죽세공 꿈꾸던 ‘촌놈’…소아마비 장애 딛고 자신의 삶 활짝 꽃피운 이채필 고용노동부장관의 라이프스토리
대학 4학년 때 전기 들어오고, 2002년 월드컵 때 간이 상수도 들어온 오지서 어린시절…라디오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지…
남들 20분이면 갈 길, 나는 1시간이 넘게 걸려…불편한 다리 탓에 어려서부터 ‘무엇을 해야 평생 먹고 살수 있을까’ 고민하며 한때 죽세공 꿈꾸기도
高1 때 한약 싼 신문지서 검정고시 광고 보고 시험 보고, 친구가 준 대학원서 냈다 장학생으로 다녔고…대학 3학년 땐 행시 도전…
인생 이모작 짓는다면 노조위원장도 해보고 싶고, CEO 돼서 노사관계 모범 사업장도 만들고 싶고…아직도 하고 싶은 일 너무 많아
소년은 어려서부터 어른다운 고민을 해야 했다. ‘무엇을 해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까. 부모님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게 자립해야 할텐데.’ 불편한 다리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통털어야 11가구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대나무가 많았다. 소년은 죽세공이 되기로 마음먹고 대나무를 다루는 기술을 틈틈이 익히기도 했다.
외딴 동네라 모내기라도 시작되면 모두 바빴다. 소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을 도와야 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못줄 잡기. 한 쪽 못줄은 자신이 잡고, 다른 쪽은 동네 어르신이 잡았다. 책임감이 컸던 소년이 잡은 못줄은 항상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소 풀을 먹이고 소죽 끓이는 일은 소년이 도맡았다. 시골에서 소가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유일한 재산 증식의 수단이다. 암송아지를 낳으면 환영받았지만, 숫놈은 찬밥신세였다. 그렇게 재산 증식의 희바가 엇갈렸다.
‘어떻게 하면 암송아지를 나을 수 있을까.’ 소년은 고민 끝에 막걸리를 먹여보기로 했다. 그 해 여름 참으로 먹고 남은 막걸리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해치우던 소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소년의 소는 그릇에 묻은 막걸리 흔적까지 혀로 핥아먹었다. 소년은 큰 누나를 졸랐다. 조악한 재료로 만든 막걸리였지만, 소는 무척 좋아했다. 덩달아 털에 윤기도 돌았다. 동네 사람들은 겨울에도 통통히 살이 오른 소를 보고 비법을 묻기도 했다.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5학년 겨울방학 때 밀주 단속이 나왔다. 단속에 걸린 소년은 아버지 주민등록증에 빨간줄이 그인다는 말을 들었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전과자가 된다는 이야기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년은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양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양조장 주인을 다짜고짜 만나 사정했다. 양조장 주인은 힘들게 찾아온 소년을 돕고 싶었다. 세무서에 소년의 사정을 전했고, 어렵지 않게 문제가 해결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자신이 벌인 일을 스스로 해결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소나기’와 같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채필(56)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1년 전 장관에 취임할 때부터 알고 싶었던 그의 어린시절과 가족 이야기, 그리고 30년 공직생활의 소회를 뒤늦게 물었다.
“내가 정치할 것도 아닌데…”라며 손사래 치던 장관도 “나눌 수 있는 희망은 나눠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협박(?)에 시간을 내줬다.
고용부 출입기자가 회사 데스크까지 동원하며 잡은 손길을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나는 1시간 10분이나 걸렸다”= 이 장관이 소년시절 보낸 고향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었다. 고향의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분위기만으로도 그림을 그리기는 충분했다. 장관이 대학 4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고, 2002 월드컵이 열린 해 간이 상수도가 들어왔다. 장관 집에는 가전제품이 없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유일했다. 라디오를 통해 세상을 접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돌려 30분 지나면 울리는 시계가 있었다. 장관은 구불구불한 길을 1시간 1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다른 친구는 20~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장관의 프로필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던 중 행정고시에 도전, 고용노동부 공무원으로 생활하며 고용부 장관이 된 첫 번째 인물로 요약된다. 한때 죽세공을 생각했던 소년이 일국의 장관이 됐으니, 개천에서 용이난 것이 분명하다.
이 장관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장관은 40여년 전 고등학교 1학년 시절로 시계바늘을 돌렸다.
“집에 있는데, 부모님이 한약을 지어왔다. 당시에는 신문지로 한약을 쌌다. 거기 보니까 검정고시 광고가 있더라. 시험치면 학력이 인정된다고 해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무렵에 시험을 쳐봤다. 그런데, 그게 합격한 것이다. 친구들이 1학년 1학기 다닐 때 고등학교를 마스터하게 됐다.”
이 장관의 어린시절은 그랬다. 우연하게 본 시험의 성적이 좋게 나왔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이 장관은 대학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죽세공 기술을 배웠을 정도니 그럴만도 했다.
“당시 대학에 가야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내가 뭔 대학에 가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가 자신이 가려고 산 원서를 나에게 줬다. 이 대학은 장학생이 되면 학비도 안 내도 되고, 숙소도 있으니까 좋다고 했다. 그래서 가게 된 것이다.”
이 장관은 영남대 법정대학 행정학과를 천마장학생 자격으로 다녔다. 입학성적이 상위 1% 안에 든 셈이다.
장관의 표현에 따르면 ‘시험운’은 계속됐다. 대학 3학년 2학기 끝무렵 행정고시를 봤다. 행정학을 전공했으니 합격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뒤늦게 운좋게 합격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25회 행시에선 기출문제가 안 나오고 응용문제가 많이 나왔다. 달달 외운 사람보다 이해하고 적용하는 사람에게 유리했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행정학이 전공 분야지만, 점수가 가장 낮았다. 대신 경제학ㆍ정치학ㆍ조사방법론이 과목 최고점수를 받았다.
▶“나를 따라오며 흉내내는 아이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시험운과 달리 일상 속에서 겪는 그의 좌절감은 상당했다. 세살 때 걸린 소아마비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어릴 때 침을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 울산ㆍ경주ㆍ부산 등등 인근에서 침 잘 놓는다는 한의사에게 모두 침을 놓게 했다. 원래가 침으로 고칠 수 없는 소아마비인데,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장관의 무덤덤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학교 다닐 때도 일부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걸어다니면, 어린애들의 주시의 대상이 된다. 나를 쳐다보고 따라오며 흉내내는 아이도 있었다. 이를 본 아주머니ㆍ아저씨들이 어린애를 혼내기도 했으며, 쯧쯧하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 당시에 소아마비를 앓은 사람이 더러 있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 몸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부모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도 아니다. 부모님이 형제를 지극히 사랑했고, 형제가 모두 농사짓는 데 다 가담했다. 모두 바쁠 때는 학교 가는 것은 차순위였다.”
다행히 그가 다닌 시골학교에는 소위 왕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공부를 곧잘 했기에 불편한 걸음걸이가 놀림감이 되지는 않았다.
“난 국민학교를 늦게 입학했다. 동급생보다 나이 많으니까 놀릴 수 없었다. 또 수업시간에 활동적이면 무시 못하고 그런 것 있지 않나.”
이 장관은 동급생에게 문제를 내 풀게 할 정도로 학습능력이 좋았다. 한 학년에 3개반밖에 없었던 초등학교가 그에게는 리더십을 배우는 공간이 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불편한 다리가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는 경우는 점차 없어졌다. 그는 자신의 보행방법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왼쪽다리만 소아비인 줄 알았다. 행정고시 합격하고 나서 채용 신체검사를 하는데, 의사가 양쪽 모두 소아마비라고 했다. 왜 양쪽이냐고 물으니, 의사가 오른발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오른발을 내 힘으로 들 수 없었다. 결국 몸을 지렛대로 삼아 한쪽 다리를 던지고, 또 다른쪽 다리를 던지면서 걸어온 셈이다. 이런 까닭에 평지나 경사가 낮은 경우에는 양발 던지기가 되지만, 계단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어렵다.”
▶“사무관도 국민을 책임지는 장관 입장에서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 행시에 합격한 그는 어떻게 고용노동부(옛 노동부)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이 장관의 설명은 간단했다.
“행시에 합격하고 중앙노동교육원에서 부처를 배정한다. 부처마다 기능이 있는데, 노동부에는 직업훈련국ㆍ직업안정국이 있었다. 능력개발하고, 일자리 주고, 근로조건 보호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일생 중 영유아 단계에는 복지부, 학생일 때는 교과부, 그리고 졸업 이후 은퇴할 때까지 가장 왕성한 시기가 노동부 일이다. 노동부일이 가장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때 노동부에 오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경쟁률도 꽤 높았다는 것이 장관의 설명이다
30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장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에 대한 애정과 긍정의 힘이었다.
행시에 합격하고 임용을 위해 신체검사를 받을 때 일이다.
“1982년 초쯤일 것이다. 임용 신체검사 하면서 의사가 ‘중노동의 경우에는 어려운 것으로 사료된다’고 적을까 물어봤다. 왠지 부정적으로 들리면 채용되지 않을 것 같아 ‘중노동이 아니면 공무원으로 근무하기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바꾸자고 제안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생관이 엿보인다.
노동부 사무관 초창기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과장이 이런 말을 했다. 과장은 국장 시각에서 일하고, 사무관은 과장 시각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과장이 국장 시각으로 일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부처에서 다루지 않으면 보완할 길이 없는데, 사무관도 최종 책임자인 장관 시각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과장이 장관 시각으로 일해야지, 국장 시각으로 일하면 안 맞는 면도 있고 한계도 있다.”
이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용부 직원에게도 하는 이야기다.
그는 한 번도 장관 자리를 꿈꿔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다.
“청와대 2년 넘게 근무하고 나올 때, 고생한 것에 대한 배려로 고향인 울산지청장으로 내려보내려 했다. 고향으로 간다는 생각에 아버지에 알렸으나, 아버지는 울산에 오지말라고 했다. 이유인즉, 고향에 아는 사람도 있고 선후배 입장도 있을것이니 원칙과 기준대로 하려면 괴로울테니 오지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이 장관의 근무지는 양산으로 바뀌었다.
하나 더 있다. 양산지청장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에는 부산 기장군도 양산지청 관할 아래 있었다. 하지만 기장주민의 교통생활권이 부산과 가까웠기에 부산 동래로 관할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건의했다. 당시 자기 구역을 떼서 다른 곳에 주는 사례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정주영 회장의 개척정신=이 장관의 멘토는 누구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잘해서 배울 점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반면교사로 배울 점이 있다. 내가 가슴 속으로 더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과 정주영 회장이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 결정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때 나라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보며, 필요하면 자기를 던질 줄 아는 분이다. 정 회장의 경우 아이디어를 제대로 실천되게끔 끌고 가는 힘이 있으며, 단점도 장점으로 바꿔서 본다.”
애국심과 개척가 정신이 뚜렷한 사람을 멘토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다.
멘토는 멘티를 탄탄하게 만들고, 또다른 멘토와 멘티를 낳는다. 이 장관은 자녀에 대한 교육관도 분명했다.
“아이들에게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해왔다. 하나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니 알아서 살아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리정돈을 잘하라는 것이다. 물건을 정리정돈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기 위치에서 자기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여망, 미션을 포함한 정리정돈을 잘하라는 얘기다.”
이 장관은 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녀 교육관과 관련해서 한 가지 말했다.
“자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방임인데, 집사람도 나랑 비슷하다. 큰애가 대입 시험보러 가는 날인데, 미역국을 끓여줬다. 아이가 시험보는 날이라고 말하니까, 미역국 먹으면 속이 편하니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고용부 관료로서 30년을 꾸준하게 걸어왔고, 장관으로서 1년을 지나왔다. 앞으로 고용부 장관으로서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남은 임기 동안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을 하나 꼽아달라는 요청에 그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산업재해, 노사관계 등 수두룩하게 내놨다. 장관의 일욕심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터라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퇴임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대신 이 장관은 이상적인 희망사항을 하나 내놨다. “인생 2모작, 3모작으로 최고경영자(CEO)를 해볼까 한다. 근로자로 출발해서 그 사업장의 노조위원장도 하고, 나중에는 사장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회사는 노사 모두가 좋아하고 성장하는 회사다. 나도 어디 근로자로 들어가서 노조위원장도 해보고, 그 회사가 필요로 하다면 CEO도 해보는 알뜰살뜰한 인생을 살아보면 좋겠다.”
노사관계 선진화에 고민을 많이 해온 장관답게 협력적 노사관계의 모범적인 기업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요즘 될 수 있으면 많이 웃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특히 고용부 직원을 대할 때면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밝은 표정을 많이 짓는다고 한다.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좋아하는 장관답게 현장에서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취임 1년에 대한 소감으로 그는 “동료 직원에게 나름대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종합적인 측면 모두 감안한 것을 다듬고, 일선에서 집행해주기를 독려하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업무에 부담된 것도 많았다. 국민을 향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직무 부하가 빠르게 가중된 면도 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글=박도제 기자/pdj24@heraldm.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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