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8회> 사랑을 위한 의식 16
FIA 즉, 국제자동차연맹에서 내세운 규정에 따르면 랠리에 출전하는 차량은 최소 2만5000대 이상 생산된 4인승 양산차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본이란 단어에 함정이 있는 것일까?
얼음과 바위, 모래 등 험난한 코스를 며칠간이나 내달려야 할 그 머신은 어쩌면 겉으로만 양산 차의 모습일 뿐, 엔진은 엄청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튜닝된 괴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경대학 정문 앞 광장에는 그런 괴물 머신을 포함해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는 클래식 카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었다. 그뿐인가? 포드, 스바루, 미쓰비시, 시트로엥, 푸조, 스즈키, 피아트, 메르세데스, BMW… 등 방귀 깨나 뀐다는 명차들이 으르렁대며 엔진을 가열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어떤 게 유로파S라는 차요?”
“저겁니다. 저 진노랑색… 저게 로터스의 명품 자동차입니다.”
“저 자그만 차가 누구?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주인공이 탔던 거라고요? 겉으로 봐선 그게 그거로구먼.”
“그래도 유호성 선수의 마음을 훔치기에는 충분한 명차입니다, 회장님.”
만경대학 정문 앞, 우글거리는 인파를 등에 지고 맨 앞에 도열해 서있던 거성의 재벌2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고, 그 옆에 긴장된 모습으로 서있던 권도일이 역시 속삭이는 투로 대답했다.
지금 누가 어떻게 주최한지는 몰라도 북한 땅에서 오랜만에 신기한 행사가 벌어지려 하는 중이었다. 거성의 재벌2세가 불쏘시개 노릇은 했지만, 그 불이 어떻게 번져 올라 지금처럼 거창한 행사로 자리잡았는지는 오로지 제6사단장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자, 저 맨 앞에 불끈 나서있는 차를 보시라요. 저게 바로 우리 인민들의 손으로 조립한 ‘천리마’입네다. 이제 저 천리마를 필두로 평양골프장까지 30㎞를 힘차게 내달릴 것입네다. 우리 조선인민의 본때를 확실히 보여줄 때가 왔다 이 말이외다.”
제6사단장은 너무 신이 나서 얼굴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 하긴 그는 이 행사를 맡아 처리하기 위해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애를 써왔다. 권도일을 창구로 하여 거성 재벌2세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저 천리마가 평양골프장까지 맨 앞에 달리게끔 약속되어 있습니까? 30㎞ 내내?”
그야 더 이상 말하면 뭐하갔소? 그 누가 감히 우리 조선의 천리마를 앞장설 수 있다는 말입네까?”
“허! 그것 참 고약하군요. 하지만 오늘은 속도경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니…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재벌2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까짓, 아무러면 어떠랴? 북한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포장해 천리마를 내세운들 세상의 언론이 속아 넘어가기나 할까? 그런다고 해서 세계 유수의 명차 제작 회사들이 눈이나 꿈쩍할까?
“엔진 시동 개시!”
확성기 소리가 울려오자 만경대학 정문 앞에 도열해 서있던 머신들이 거의 동시에 우르릉거리며 엔진 시동을 거는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스피드 쇼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쇼크야말로 어느 경우보다도 인내심이 필요한 퍼포먼스였다.
“끝까지 저 똥차 뒤를 따라서만 가란 말입니까? 정말로요?”
권도일의 오른쪽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으로 목멘 불평이 터져 나왔다. 비싼 돈을 들여 임대한 유로파S의 임시 드라이버로부터 전해져오는 무전 소리였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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