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5회> 사랑을 위한 의식 (2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랠리경기가 시작되면 저 호텔 위에서 내려다보시겠다고요? 저를?”

유호성이 재차 물었을 때 예원희는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만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였다.

“호텔이라면서요? 저기는…”

이렇게 되물어도 역시 까딱까딱.

“그 말씀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이… 호텔에서… 남자인… 저를 기다리겠다는 뜻인가요? 설마…”

칼을 뽑은 김에 조카 연필이라도 깎아야겠다는 심정으로 그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는가? 그녀는 살랑살랑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호성은 자신이 그녀의 심중을 꿰뚫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언뜻 파리-다카르 랠리라든지, 혹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날이 저물 때마다 선수들이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포스트의 정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날이 저물고 지정된 포스트에 도착하면, 하루치의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낙원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젖곤 했다. 아니 진정 그곳은 낙원이었다.

함께 따라간 지원팀 요원들이 정비는 물론, 기름 보충, 윤활유 보충, 세차 등등을 도맡아 처리하는 동안 드라이버는 온 몸에 스며든 피로와 긴장을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포스트였기 때문이다.

“기자 분께 정식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5개국 관통 랠리 스케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까? 여기 평양골프장 앞으로 랠리 카가 달리게 되나요? 아니… 그보다도, 이곳에 포스트가 세워지는 게 분명합니까?”

“그럼요. 지리적 여건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여기가 마지막 포스트가 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양각도 호텔을 중심으로 해서 분위기도 유럽풍이지요… 거리상으로 결승점인 판문점 근처 월정리까지 도착할 시간을 가늠하기에도 좋지요… 에 또…”

“시간가늠은 해서 뭐하지요?”

“그야 테레비 중계를 잘 하려면 선수들이 도착할 시간을 미리 예견하고 있어야지요. 평양에서 판문점 월정리까지가 어림잡아 서울에서 청주에 가는 정도 되거든요? 유호성 선수께서 속도차로 몰아가면 대략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시간 정도? 포장도로를 달리는 거니까요.”

“바로 그 시간에 맞춰서 우리 위대한 장군님이 등장하실 거란 말이에요.”

“외국 방송사들이 실황 중계를 하는 거야 기정사실이겠지만… 누가 판문점까지 가신다고요? 김정은 국방위원장 말씀입니까?”

“쉿! 조용히 하세요.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여기 평양골프장 앞이 포스트로 선정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해요?”

“중요하지요. 예원희 씨가 호텔에서 기다리는데 여길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다 된 밥이었다. 만난 지 불과 십 여분, 이름을 밝힌 지 불과 수 분만에 호텔에서 동침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니 더 이상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유호성은 북한 땅에서도 먹혀드는 자신의 캐릭터에 은근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원희는 전혀 다른 상념에 빠져들었다. 덫을 치자마자 덜컥 걸려들고야 마는 얼간이 앞에서… 그녀는 마음속의 연인, 권도일을 기억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 날이 당신 제삿날이자 권도일 씨가 한을 푸는 날이지…’ 하는 생각이 들자 예원희의 가슴이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