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의 ‘무제’(1968)와 장욱진의 ‘무제’(1964) 작품이 나란히 걸린 모습. 이정아 기자
마크 로스코의 ‘무제’(1968)와 장욱진의 ‘무제’(1964) 작품이 나란히 걸린 모습.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색면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와 한국적 모더니즘을 이끈 선구자 장욱진(1917~1990).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 속에서 각기 다른 여정을 거쳐온 동서양 작가들이 1960년대에 그린 추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한쪽에선 로스코의 노란빛이 미묘한 덩어리감을 이루며 울렁이고, 다른 한쪽에선 장욱진의 소박한 손길로 응축해 칠한 어둠이 자리 잡는다. 마치 오랜 대화를 나누는 듯 두 작품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서울 리움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전 전시장 초입에선 이처럼 동서양 거장들의 예기치 못한 조우를 만나볼 수 있다. 44점의 작품들이 연대나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과 의미가 흐트러진 장소에서 함께 자리해서다. 미술사적 지식이나 주입식 읽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전시를 온전히 경험한 뒤, 각자 자기만의 각주를 달며 자유로이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전시의 특징이다.

리움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전 전경. 이정아 기자
리움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전 전경. 이정아 기자

로스코의 화면을 보면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 황혼이 떠오른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빛 속에서 어둠이 조금씩 스며든다. 겹겹이 쌓인 색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의 떨림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의 노란색은 더 이상 한낮의 태양이 아니다. 어쩌면 눈을 감기 직전에 마주할 수 있을 법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반면 장욱진의 검은 화면은 별 하나 없이 캄캄한 깊은 밤하늘 같다. 짙고 단단한 어둠 속, 그 안은 고요히 비어 있다. 바람이 지나가며 잠시 작은 숨결들이 떠오른다. 불필요한 요소가 모두 덜어진 채 오직 투박하게 남은 선과 꾸밈없는 색만이 드러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새로운 공간이 깨어나고, 그림자가 만들어낸 미세한 빛이 반짝인다.

이 두 작품이 함께 걸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스코는 스러지는 빛을, 장욱진은 끝자락의 숨소리를 그렸다. 하나는 저무는 낮을, 다른 하나는 짙은 밤을 품고 있다. 추상과 추상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로의 세계가 교차한다.

그리고 두 작품의 배치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빛과 어둠은 정말 반대일까. 생과 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를까. 그저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 그 경계를 바라보며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1884-1895, 1996년 주조). 이정아 기자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1884-1895, 1996년 주조). 이정아 기자

이처럼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리움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전은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을 맞아 개최됐다. 2002년 리움미술관 재개관 상설전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소장품전으로, 35명 작가의 작품들이 M2와 로비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특히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과 함께 최근 새로 소장한 작품들이 대거 소개된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 대표적이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점령당한 프랑스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시민 영웅 6인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걸작으로, 12점만 제작된 오리지널 에디션 중 마지막 작품이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옛 로댕갤러리)에 상설 전시됐다가 2016년 플라토가 폐관한 뒤 9년 만에 공개됐다.

이밖에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을 비롯해 미국 미니멀리즘 작가 솔 르윗과 칼 안드레, 추상 조각가 루이스 네벨슨과 얀 보,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 작가 로버트 라우셴버그 등 대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미 알려진 대표적 작품보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중요 작품과 최근 소장품으로 현대미술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라고 말했다.

전시 종료일은 미정이나, 내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성인 1만2000원.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