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아역스타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성공적 복귀
첫 천만영화 ‘실미도’로 제2 전성기
2019년 혈액암 투병에도 연기 열정
평생 영화 외길만 걸었다. 대통령과 거지로, 스님과 군인으로, 때론 평범한 아버지로. 1957년 데뷔부터 70년간 영화계를 지켜온 안성기는 한국 영화사의 산증인이자 변화무쌍했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안성기는 5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향년 74세.
그는 지난달 30일 오후 자택에서 음식물을 먹다 쓰러져 자택 인근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황혼열차’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 감독이 당시 5살이었던 그를 데려다가 연기를 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모정’(1958), ‘10대의 반항’(1959), ‘하녀’(1960) 등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아역 스타로 자리매김했지만, 이후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10여년간 배우 생활을 쉬었다. 학업과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77년 ‘병사와 아가씨’로 충무로 복귀를 알렸다.
안성기는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 신인상을 품에 안으며 성인배우로서 발돋움에 성공했다. 영화에서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통해 현실 속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그 시대 청년들의 얼굴을 연기했다.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리얼리즘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청춘 영화 대표작인 ‘고래사냥’(1984)을 비롯해 ‘만다라’(1981), ‘깊고 푸른 밤’(1985), ‘철수와 만수’(1988) 등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이를 발판으로 안성기는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오르며 80년대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는 현대사의 혼란과 고통, 변화 속에 고뇌하는 청춘의 상징이었다. 안성기는 데뷔 이후 2020년대 초까지 총 1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특히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에선 종군기자 출신 빨치산 ‘이태’로 분해 전쟁의 비극과 이념의 허상을 대변하며, 분단을 이념 대립의 소재로만 이용했던 당시 사회적 금기를 깨는 파격적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분단 영화의 공식을 깨트린 이 영화로 안성기는 당시 17년 만에 부활한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어 ‘하얀 전쟁’(1992)으로 정 감독과 다시 의기투합했고 1993년엔 박중훈과 함께 ‘투캅스’(1993)에 출연, 한국형 코믹 액션으로 장르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빗속에서 주먹을 나누는 희대의 명장면을 남겼다.
한국 영화 최전성기의 선봉에도 안성기가 있었다. “날 쏘고 가라”라는 명대사를 남긴 ‘실미도’(2003)는 한국 영화 최초 1000만 관객을 기록, 흥행 역사의 신기원을 썼다. 그는 2006년 ‘라디오 스타’가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기도 했다.
안성기는 작품 활동 외에도 ‘큰 어른’으로서 위기의 최선전에서 영화계를 지켜왔다. 스크린 쿼터 축소 논의가 일었던 지난 2006년 그는 직접 피켓을 들고 거리로 향했고 불법 다운로드 반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의 자유’ 지지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30년 이상 국제구호단체 유니세프의 친선 대사로도 활동했다.
안성기는 2022년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난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온 사실을 뒤늦게 알렸다. 하지만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과 복귀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는 2022년 대종상 공로상 수상 당시 영상을 통해 “아주 좋아지고 있다. 새로운 영화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곧 촬영장에 돌아올 것”이라던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안성기와 함께한 한국 영화의 70년은 따뜻한 봄이었고, 뜨거웠던 여름이었으며 눈부신 가을이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아내 오소영 씨와 아들 다빈·필립 씨가 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9일 오전 6시. 손미정 기자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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