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태어난 걸작 ‘나부코’

2500년 전 바빌로니아 제국

2026년 ‘왕좌의 게임’ 재탄생

체스와 운명의 수레바퀴 위 대합창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왕과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딸, 단 한 번도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이자 짝사랑 대상마저 정비 소생의 이복동생(페네나)이었던 비운의 장녀. ‘출생의 비밀’과 왕이 구상한 후계를 알게 된 아비가일레가 격정적 레치타티보로 수치와 분노를 쏟아낸다. 거친 포르티시모로 몰아치던 오케스트라가 갑작스레 멈추자, 애처롭고 맑은 플루트 솔로가 심리적 징검다리를 놓는다.

투박하고 묵직한 창살이 솟구친 왕좌(王座)로 향하는 다섯 개의 계단. 갑옷 같은 가죽 드레스를 입은 여전사가 육감적 실루엣을 일렁이며 걸음을 옮긴다. 폭력의 세계에서 단련된 강인함은 사라진 채, 권좌를 더듬는 손길이 유혹적이다. 차디찬 청동 쇠붙이를 갈구하듯 농염한 애무는 이내 자기 몸으로 향한다. 거대한 왕좌를 침대 삼아 누워 오르가슴을 탐닉하는 욕망의 여전사. 결핍으로 빚어진 자아의 권력욕은 성적 욕망과 뒤엉켜 인간의 굴절된 갈망을 드러낸다.

40년 만에 막을 올린 서울시오페라단의 ‘나부코’ 2막 1부 1장. 그 유명한 아비가일레의 아리아는 완전히 다른 색깔을 입었다. 역대 ‘나부코’ 중 가장 파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출을 맡은 장서문은 “‘한 때는 내 마음도 기뻤던 적이 있었지’라는 아비가일레의 아리아를 듣고 굉장히 섹슈얼(sexual)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음악에 내재한 뒤틀린 욕망과 왜곡된 기억이 합쳐져 왕좌를 만지자마자 오르가슴을 느끼는 모습으로 풀어봤다”고 말했다. ‘아빌가일레가 갈망하는 가장 좋은 순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권력과 안정감을 얻었을 때’라는 해석을 대담하게 시각화한 것이다.

모든 서사의 근원엔 ‘욕망’이 있었다. 권력, 광기, 상실, 비애의 문을 여는 열쇠는 그 모든 ‘욕망하는 존재’들이 쥐고 있었다. 작금의 주세페 베르디를 있게 한 ‘출세작’ 격인 오페라 ‘나부코’. 6세기 바빌로니아는 시대를 초월해 ‘욕망하는 존재들’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가장 밑바닥에서 쓴 오페라…‘비바 베르디’

1840년대 초, 이탈리아 밀라노. 어느 젊은 작곡가의 삶은 출구 없는 터널에 갇혔다. 딸과 아들은 하루아침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를 잃은 슬픔에 빠질 새도 없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도 수막염으로 생을 등진다. 고작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결혼 4년 만에 가족 셋을 떠나보낸 비극이 벼락같이 들이쳤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을까. 가족을 잃은 작곡가에겐 재능도 무용지물이었다. 두 번째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이 초연 첫날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자살을 결심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이 비극적 현실의 주인공은 바로 주세페 베르디(1813~1901)다.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그때,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 메렐리가 찾아왔다. ‘백 마디 말’ 대신 한 권의 대본을 책상 위에 놓고 조용히 떠났다. 테미스토클레 솔레라가 쓴 ‘나부코도노소르’였다. 베르디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대본을 읽던 중 ‘날아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구절에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히브리인들이 유배지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랫말이었다. 베르디는 홀린 듯 펜을 잡고 오페라를 써 내려갔다. ‘나부코’는 이렇게 태어났다.

1842년 3월 9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8회로 예정됐던 공연은 무려 67회나 연장됐다. 이에 스칼라 극장은 베르디에게 매 시즌 오페라 한 편씩을 써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스칼라 극장은 지휘 거장 정명훈이 2027년부터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는 곳이다) 세 번째 오페라로 이런 영광을 거머쥔 작곡가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베르디는 ‘자고 일어나니’ 이탈리아의 국민 작곡가가 됐다.

‘나부코’에는 ‘실존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베르디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아내와 자녀를 잃은 상실, 작곡가로서의 좌절, 다시 서려는 의지 등 작곡가 자신이 겪은 상실의 서사가 히브리 민족의 포로 생활과 해방의 서사 안으로 깊숙하게 스몄다. 구약성경 속 사건들을 재해석한 역사극이면서 작곡가 개인의 감정이 폭발하는 대서사인 것. 극 속에 두 개의 역사가 공존하는 셈이다.

오페라는 개인의 역사로만 남지 않았다. 당대의 ‘역사’와 다시 만난다. ‘나부코’ 탄생의 불씨가 됐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일으켰다. 19세기 중반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 관객들은 바빌론에 끌려간 히브리인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했다. ‘나부코’의 대표곡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곧 이탈리아 민중의 목소리로 번역됐다.

초연 당일부터 오스트리아 당국의 금지에도 앙코르 요청이 쏟아졌다. “베르디 만세(Viva Verdi)”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 국왕 만세”의 머리글자이기도 하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리소르지멘토의 음악적 상징이 됐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나부코’를 공연하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앙코르 포함 두 번씩 연주하는 것이 관례다.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체스판과 운명의 수레바퀴, 그리고 왕좌의 게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

거대한 링이 솟구치며 하늘과 땅이 갈라진다. 무(無)에서 유(有)로 향하는 길, 이것은 천지창조, 대서사의 시작이다.

창조된 세계는 거대한 게임판이다. 가로, 세로 20m의 무대로 가득 메운 체스판, 그 위로 위압적인 ‘운명의 수레바퀴’가 놓인다. 이때 인간은 한 마리의 말이었다. 그들의 의지는 하늘의 섭리를 이기지 못한다. 타로카드 10번,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 문명의 부흥과 몰락의 순환을 내려다본다.

장서문 연출가는“‘나부코’의 첫 리딩에서 ‘왕좌의 게임’과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서사극의 코드가 떠올랐다”며 “‘나부코’ 세계관을 과학 이전의 시대인 ‘블랙 피리어드(Black Period)’로 설정하고 다크 판타지적 미학을 극대화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기원전 6세기, 고대의 세계는 ‘왕좌의 게임’과 절묘하게 만났다. 장 연출가는 “우리는 중세를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기 이전, 르네상스 이전의 세계를 말하지만, 나만의 중세의 기준은 과학 이전의 시대에 발현된 ‘인간의 상상력’이 지배한 시대”라고 했다. 타로카드, 미신, 신의 존재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며, 그 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과학 이전의 세계’라는 것이다.

장서문식 ‘시대 기준’의 대전제 위에서 ‘나부코’는 ‘극과 극’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새로 썼다. 흥미로운 지점은 정복자 바빌로니아를 문명이 아닌 ‘야만의 제국’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장 연출은 ‘나부코’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기 위해 나부코 2세와 바빌론 제국의 전사를 집요하게 연구했다. 바빌로니아를 지배한 아시리아는 역사적으로도 극도의 야만성과 힘으로 세계를 통치한 제국이다. 정복한 왕의 목을 베거나 도시를 불태우는 ‘공포’를 수단으로 제국을 유지해 왔다.

오페라 ‘나부코’에서 연출가는 정복자 바빌로니아를 문명이 아닌 ‘야만의 제국’으로 설정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오페라 ‘나부코’에서 연출가는 정복자 바빌로니아를 문명이 아닌 ‘야만의 제국’으로 설정했다. [서울시오페라단 제공]

장 연출가는 “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나부코 2세의 아버지인 1세 때 해방됐지만, 오페라의 주인공인 나부코 2세는 아버지가 겪은 야만적 힘을 학습했다”며 “힘이 없으면 침략당하고 지배당한다는 공포가 나부코 2세에게 새겨졌다. 그에게 정복 전쟁은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제국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봤다.

이 과정에서 나부코 왕은 과학 이전의 샤머니즘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신을 거부하는 자로 등장한다. 장 연출가는 “나부코는 종교적 신념이나 유일신 사상에 의존하기보다 실질적 군사력과 노동착취를 통해 제국의 부를 쌓았다”며 “짧은 시간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부를 축적한 배경에 약탈과 착취가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조지 R.R. 마틴의 소설이자 미국 케이블방송 HBO의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아시리아에서 이어지는 바빌로니아 제국과 평행이론을 이루는 ‘힘의 세계’다. 연출가는 아시리아에서 학습된 ‘바빌로니아의 문화’를 동물적 서열 사회로 봤다. 힘에 의한 야만성의 세계다.

원전에서 아비가일레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페네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는 결말을 뒤집었다. 대제사장이 아비가일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후 제거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비가일레를 도구로 삼은 것이다. 권력욕에 휩싸인 아비가일레는 음모를 읽지 못하고, 술에 탄 독약을 순진하게도 몇 잔이나 들이켠다. 자결이 아닌 독살. 아비가일레는 끝내 자신의 죽음조차 자기 것으로 갖지 못했다.

‘나부코’는 베르디의 초기작으로 벨칸토 오페라 전성기의 ‘막차’를 탄 작품이다. 이번 오페라는 입체적 세계관을 그린 만큼 음악의 해석도 달라졌다. 지휘를 맡은 이든은 음악으로 ‘야만’과 ‘장엄’을 분리해냈다. 그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한꺼번에 몰아치듯, 거칠고 건조한 소리로 밀어붙였다”며 “울림을 길게 남기기보다, 날 것의 감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서사적 확장을 요구하는 대목에서는 접근을 달리했다. 이든 지휘자는 “템포를 늦추고 화성의 밀도를 높였으며, 오케스트라와 반다를 입체적으로 활용해 금관의 중량감 있는 음향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설계했다”고 귀띔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나부코’에서 왕이 벼락을 맞아 힘을 잃는 순간, 장녀 아비가일레에게 모든 권력이 넘어간다. ‘왕좌의 게임’을 빼닮은 세계관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나부코’에서 왕이 벼락을 맞아 힘을 잃는 순간, 장녀 아비가일레에게 모든 권력이 넘어간다. ‘왕좌의 게임’을 빼닮은 세계관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나부코’ 세계관 VS ‘왕좌의 게임’ 세계관

‘나부코’와 ‘왕좌의 게임’의 세계관이 공명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장 연출가가 ‘왕좌의 게임’ 세계관을 대입해 ‘나부코’ 세계관을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대전제를 설정했다.

먼저 두 세계관 모두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다. 장 연출가는 “‘나부코’를 읽으며 ‘왕좌의 게임’이 떠올랐다. 특히 바빌로니아의 군사들을 서술한 글에서 곧바로 도트라키가 연상됐다”고 말했다.

‘왕좌의 게임’ 세계관에서 최강의 기마민족인 도트라키 부족은 수장 ‘칼(Khal)’의 자리는 혈통이 아닌 오직 힘으로 쟁취하고, 약해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다. 나부코 왕이 벼락을 맞아 힘을 잃는 순간, 장녀 아비가일레에게 모든 것이 넘어가는 구조도 이 논리와 일치한다.

두 번째 전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권력 투쟁과 힘의 논리를 무력화하는 ‘초월적 권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왕좌의 게임’에선 백귀(White Walkers)라는 신적 차원의 위협, ‘나부코’에선 ‘신의 벼락’이다.

두 세계관 모두 아무리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도, 그 모든 것이 더 큰 힘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힘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그보다 더 큰 힘이 개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은 두 작품을 잇는 가장 깊은 층위의 연결고리다.

연출가는 이를 ‘운명의 수레바퀴’ 구조물로 시각화했다. 철왕좌도, 나부코의 왕좌도, 도트라키의 칼도 결국 수레바퀴 아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해석 아래 연출가는 ‘왕좌의 게임’ 속 캐릭터로 ‘나부코’ 안으로 속속 대입해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었다.

‘왕좌의 게임’ 속 철왕좌 [HBO 제공]
‘왕좌의 게임’ 속 철왕좌 [HBO 제공]

① 나부코의 왕좌 = ‘왕좌의 게임’ 속 철왕좌(Iron Throne).

드라마에서 왕국을 정복한 아에곤 타르가르옌이 굴복한 적들의 검 1000자루를 용의 불꽃으로 녹여 만들었다. 뾰족한 검들이 사방으로 튀어나온 거대하고 기괴한 형태. 앉는 것조차 위험한 도전이다. “왕좌는 편안해서는 안 된다. 왕은 항상 긴장해야 한다”는 철학이 담긴 설정이다.

드라마의 핵심 서사는 “누가 이 철왕좌에 앉을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철왕좌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물질적 형상화로 드라마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나부코의 왕좌도 마찬가지다. 외형 역시 ‘철왕좌’의 심플 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서사적 기능이 빼닮았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인물이 싸운다는 점이다. 아비가일레가 왕좌를 향해 오르고 그 위에서 욕망의 화신이 돼가는 것 역시 ‘왕좌의 게임’을 차용해 설득력을 얻는다. 왕좌 자체를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로 보기 좋게 드러냈다.

② 바빌로니아 군사 = 도트라키.

장서문 연출가가 직접 밝힌 연결고리다. 힘만이 지배 원리인 세계, 정복이 곧 존재 방식인 민족, 잔혹함이 문화인 집단이다. 이는 아시리아를 학습한 바빌론과 도트라키 양쪽에 해당한다. 아비가일레가 왕좌에 올랐을 때, 그녀에게 ‘간택’받기 위해 바빌로니아 군사들이 벌이는 잔혹한 ‘데스 게임’(검투사 싸움) 장면 역시 도트라키의 의례적 폭력 문화와 일맥상통한다.

나부코 왕이 끌고 다니는 늑대개 두 마리는 ‘왕좌의 게임’ 속 다이어울프의 와형과 판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나부코 왕이 끌고 다니는 늑대개 두 마리는 ‘왕좌의 게임’ 속 다이어울프의 와형과 판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③ 나부코 = 로버트 바라테온.

한때 천하를 호령했으나 내부에서 무너지고 광기와 몰락의 과정을 겪는다는 점이 비슷하다. 나부코와 로버트 바라테온은 정복자로서의 영광 뒤에 가려진 인간적 나약함과 권력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장서문 연출가는 나부코가 벼락을 맞는 찰나의 심리적 붕괴를 ‘왕좌의 게임’ 식 야만족 서열 사회의 붕괴로 치환,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을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추락하는 인간의 자화상’으로 다시 그렸다.

④ 아비가일레 = 써시 라니스터.

장서문 연출이 그려낸 아비가일레는 정통성이 아닌 욕망과 의지로 왕좌를 찬탈한다는 점에서 ‘왕좌의 게임’의 써시 라니스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두 인물을 움직이는 엔진은 완전히 다르다. 써시의 폭주가 자녀를 지키려는 비뚤어진 모성에서 발현된다면, 아비가일레의 광기는 아버지 나부코에게 인정받지 못한 근원적 결핍에 기인한다. 연출가는 ‘인정 욕구의 좌절’을 권력에 대한 육체적 탐닉으로 치환, 그녀의 악행을 ‘사랑받지 못한 영혼의 발악’으로 재해석했다.

⑤ 늑대개 = 다이어울프.

오페라가 시작되고 장장 30분. ‘비바 나부코’를 외치며 왕과 왕의 부대가 등장한다. 그의 손에 쥔 긴 쇠줄에 묶인 두 마리의 늑대개.

네 발로 바닥을 긁고 매섭게 뛰어오르는 두 무용수의 연기마저 압권이다. 시각적으로 늑대개는 다이어울프의 ‘나부코’ 버전이 확실하다. 다만 상징의 방향성은 정반대다. 다이어울프는 스타크 가문의 영혼과 연결된 보호와 유대의 상징이다. 반면 오페라의 늑대개는 나부코의 야만성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벼락을 맞은 나부코를 물어뜯어 주인의 몰락을 가속하는 역할이다. 장 연출가는 “동물의 직감은 인간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점이 있다”며 “ 나부코의 충실한 신하였지만, 벼락 맞은 나부코는 이전의 나부코와는 다른 사람이자 늑대개들에겐 약자이기에 공격한 것”이라고 했다.

오페라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오페라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욕망과 욕정의 이중주...‘나부코’의 연출 미장센

권력 투쟁을 상징하는 거대한 체스판이 가로세로 20m의 정사각형 무대를 가득 채우고, 그 위로 각각 16m, 12m짜리의 두 개의 링이 바빌로니아 제국과 유대인들의 운명처럼 끊임없이 이동한다. ‘왕좌의 게임’식 캐릭터의 재해석을 비롯해 이번 오페라 ‘나부코’에선 유달리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거대한 세계관의 기저엔 ‘욕망’이라는 근원이 지탱하고 있다.

연출은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시각적 방식을 택했다. 장 연출가는 “이 장면들이 과감하거나 자극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인생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감정과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직관적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연출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① 서곡 : 타락한 유대 민족

8분간의 서곡. ‘나부코’의 전사가 음악에 실려 구약 성경의 창세기와 신명기적 사관을 바탕으로 유대 민족이 광란의 몸짓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음악이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 유대 민족이 서로를 탐닉하며 광란에 빠진 모습이 등장한다. ‘마녀들의 파티’ 같기도, 21세기 어느 도시의 클럽 같기도 하다.

이 장면은 여러 층위로 읽힌다. 가장 직접적 해석은 성경적 인과관계의 시각화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침략당하는 것은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신의 징벌’이다.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타락에 빠진 결과라는 ‘인과응보적 개연성’을 부여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이들이 왜 포로가 됐는가’에 대한 답을 서사가 열리기 전에 먼저 심어두는 프롤로그다.

하지만 장 연출가가 세운 ‘나부코’ 세계관 안에서 들여다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히브리 민족도 타락의 순간에는 바빌론의 야만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그린 장면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인간이 광기와 탐욕의 본능 앞에 취약함을 드러내는 장치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악인만 짓밟는 것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가 된 아비가일레가 연 축제연에선 글래디에이터들의 ‘데스 게임’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최고 권력자가 된 아비가일레가 연 축제연에선 글래디에이터들의 ‘데스 게임’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다만 이 연출에는 위험한 점도 있다. ‘타락했으니 침략당해도 싸다’는 식의 사고는 야만적 침략을 피해자들의 탓으로 돌리며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서문 연출가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서 시민 합창단을 ‘이미 죽은 유대인들의 영혼’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그는 이 장면을 심판의 전제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취약함으로 읽히게 하려 한 것이 분명하다.

② ‘욕망과 욕정의 화신’ 아비가일레

“오늘 밤은 너야.”

왕좌에 앉은 절대 권력 아비가일레. 최고 권력자가 된 아비가일레가 연 축제연에선 글래디에이터들의 ‘데스 게임’이 한창이다. 술잔이 마르지 않는 아비가일레는 탐욕스러운 미소로 근육질의 전사들을 훑는다. 마침내 가려진 최종 승자는 아비가일레의 ‘간택’을 받는다. ‘여왕의 보상’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아비가일레는 데스 게임에서 살아남은 전사의 입술과 몸을 탐닉한다. 아비가일레의 권력은 상대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③ 55명의 영혼이 걸어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오페라 ‘나부코’를 볼 때 관객들이 가장 기다리는 장면은 3막에 있다. ‘나부코’를 보지 않았어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멜로디를 들어본 바로 그 음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장면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대 위 체스판. 오페라는 영상까지 활용해 유대인의 삶을 굽이굽이 이어지는 체스판 위에 놓인 말로 형상화한다. 장 연출가는 “나부코 왕의 잔혹함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수도로 끌고 간 ‘바빌론 유수’ 사건에 있다”며 “내 나라 내 땅을 떠난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빌론에 와서 노예로 살며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는 삶을 사는 이들의 참담함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55명의 시민 합창단이 객석으로 내려와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세종문화회관 제공]
55명의 시민 합창단이 객석으로 내려와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세종문화회관 제공]

무대 위 노예들의 눈빛이 공허하고 허망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드리울 때, 이미 떠나간 유대인의 영혼, 무대 위 노예들의 영혼 55인이 촛불을 들고 객석으로 유유히 흐른다. “육신은 저기(바빌론)에 갇혀 묶여 있지만, 영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연출이다. 이 장면은 시민 합창단 55명이 만들었다. 무대 위 프로 합창단과 섞이는 대신 객석으로 걸어 나오는 별도의 장면으로 시민 합창단에도 특별한 순간을 만들었다.

음악적으로도 숭고한 아름다움이 살아났다. 기존 템포보다 느리고 긴 프레이징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든 지휘자는 “긴 시간 동안 히브리 노예들이 처한 상황이 지속되는 처절한 음악 속에 스며 나오도록 했다”며 “상실감과 그리움이 보일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각각의 요소도 절묘하게 매만졌다. 이든 지휘자는 “객석을 걷는 시민 합창단은 속삭이듯이 (sottovoce) 부르고, 무대 위 프로 합창단은 여운이 느껴지도록 노래했고,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와 투바의 비트를 너무 짧지 않고 조금 더 부각될 수 있게 연주했다”고 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순간, 억압과 자유의 정서가 피부로 전달된다. 우리 모두가 억압의 역사 속 어딘가에 있다는 보편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다만 오페라는 전쟁이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과 맞물린 탓에 어찌할 수 없는 간극을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다.

‘나부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 아비가일레는 원전에서 자결하나, 이번 작품에선 독살당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나부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 아비가일레는 원전에서 자결하나, 이번 작품에선 독살당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④ 아비가일레의 죽음 — 독살인가, 자결인가

원전에서 아비가일레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페네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는 결말을 뒤집었다. 대제사장이 아비가일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후 제거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비가일레를 도구로 삼은 것이다. 권력욕에 휩싸인 아비가일레는 음모를 읽지 못하고, 술에 탄 독약을 순진하게도 몇 잔이나 들이켠다. 자결이 아닌 독살. 아비가일레는 끝내 자신의 죽음조차 자기 것으로 갖지 못하는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 해석은 아비가일레의 급격한 심리 변화를 드러내는데 설득력을 갖는다.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죽음 앞에서, 그토록 강인했던 아비가일레가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비굴해진다. 아리아의 노랫말이 담은 난데없는 사죄와 회개의 제스처 대신 “죽음이 두려워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그간 아비가일레의 서사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연출의 해석은 날카롭다. 그러나 무대 위 아비가일레에게선 죽음 앞의 두려움과 비굴함은 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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