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5년간 제작기

원작에 없던 ‘109’ 등장·유미 존재감 적어

‘메이저·마이너’ 계급도 뮤지컬에만 존재

반복되는 멜로디에 바그너·복선 숨겨놔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총명한 눈빛을 빛내는 이성 세포,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서 뾰로통한 입술을 내미는 감성 세포, 시종일관 훌라후프를 돌리는 다이어트 세포, 그 옆에서 “떡볶이는 먹고 싶다”며 ‘오늘의 메뉴’를 고민하는 출출 세포, 이들의 뒤에서 지출 수도꼭지를 틀어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자린고비 세포…. 쫄쫄이 타이츠를 벗어 던진 세포들이 무대 위로 튀어나왔다.

연애도 직장도 이상 무! 무탈하고 평온한 날들을 보내는 ‘보통의 일상’이 이어지면 아기자기한 세포마을이 등장한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유미의 머릿속은 신비로운 소우주다. 세포들은 저마다의 동선 안에서 유미의 행복을 위해 각자의 삶을 산다.

누적 조회수 34억 뷰를 기록한 네이버 메가 히트 웹툰, 전 세계를 사로잡은 드라마와 3D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장악한 슈퍼 IP(지식재산권) ‘유미의 세포들’이 3차원 시공간과 마주했다. 무한 스크롤 속에 유영하던 방대한 ‘내면세계’를 무대로 올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도 복잡한 한 인간의 우주를 펼쳐내기 위해 장장 5년의 산고를 치렀다.

“아예 유미를 빼고 갑시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23일까지, 예술의전당)을 무대로 올리는 초기 단계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버젓이 주인공 유미의 이름이 박제된 작품이긴 했지만, 창작진은 ‘유미’가 아닌 유미의 ‘세포들’에 주목했기에 유미의 존재감을 확 줄였다.

“세포 시점으로 작품을 구상한 후, 누구를 주인공으로 세울 것인지 많은 실험을 거쳤어요. 사랑 세포를 주인공으로 할지, 유미의 꿈인 작가 세포를 주인공으로 삼을지 여러 안들이 나왔죠. 무대에서 인간 유미를 아예 뺄까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웃음)” (김가람 작가)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티파니 영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티파니 영 [샘컴퍼니 제공]

극 중 유미의 연애사와 직장생활 분투기까지 따라가려다 보니 ‘세포들의 공간’은 비좁아졌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유미 없는 ‘유미의 세포들’이었다. 극단까지 시도한 ‘세포들의 모험극’ 형태였다. 하지만 난관은 또 찾아왔다. 김가람 작가는 “유미라는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지니, 관객이 감정의 닻을 내릴 곳이 없었다”며 “결국 ‘유미의 세포들인데 유미가 없으니 서사를 끌고 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진실에 도달했다”고 돌아봤다.

대학로 무대에서 ‘아랑가’ 등을 통해 날카로운 필력과 탁월한 서사적 감각을 증명한 김가람 작가와 ‘브로드웨이 42번가’, ‘토요일 밤의 열기’를 작업한 최재광 작곡가가 의기투합한 지 약 5년. 2021년 겨울, 장안동 작업실에서 첫발을 뗀 이래 수없이 엎어지고 다시 쓰인 악보와 대본만 해도 수천 장이다. 최재광 작곡가는 “사라진 장면과 음악만 모두 모아도 뮤지컬 두세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귀띔한다.

기나긴 시행착오 끝에 태어난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을 만든 ‘결정적 선택’들이 있다. 창작진이 무대 곳곳에 심어놓은 이 장치들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웹툰에도 없던 ‘109’, 뮤지컬에선 왜 만들었나?

그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은 유미도, 유미의 ‘프라임 세포’인 사랑 세포도 아니었다. 무대가 막을 올리고 세포마을 풍경이 이어지는 5~10분 사이. 파란 옷을 입지 않은 세포 하나가 튀어나온다. ‘유미의 세포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서사를 추동하는 존재. 원작의 어떤 컷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낯선 이방인, 이름조차 갖지 못한 견습 세포 ‘109’였다.

“원작이 워낙 메가 텍스트이다 보니 회의를 거듭해도 중심축이 잡히지 않았어요. 세포들의 이야기를 뮤지컬화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택지는 당연히 사랑 세포였죠. 하지만 사랑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흔히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사랑에 빠지고 이별에 아파하는 흔한 서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요.” (김가람)

기나긴 마라톤 회의 끝에 창작진 모두가 탈진 상태에 직면했다. 김 작가는 배수진을 치듯 백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써 내려갔다. 무슨 배포였는지 번쩍 떠오른 것은 없었지만, “다음 주까지 무언가를 해오겠다”고 기획 회의에서 선언했다. 그날 뚜렷하진 않았지만, 김 작가의 머릿속에 ‘촉 세포’의 전구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원작에 없던 세포 하나가 생겨난 순간이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109 역할의 최재림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109 역할의 최재림 [샘컴퍼니 제공]

김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무명(無名)의 세포가 세포마을의 변두리를 떠돌며 겪는 성장담’을 구상했다. 유미의 생일인 1월 9일에서 착안해 명명된 ‘109’. 견습 세포로 설정된 109는 현생에 지친 유미가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둔 ‘자존감의 원형’이었다.

최재광 작곡가에게 ‘109의 등장’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음악 안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낸 ‘결정적 순간’이었다. 최 작곡가는 “뮤지컬이란 장르는 기존의 다른 매체나 공연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독창성)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며 “109라는 캐릭터가 대본에 등장하는 순간 ‘바로 이거다, 이제 모든 문제가 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최 작곡가는 109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은 넘버인 ‘하나의 우주’를 가장 먼저 작곡했다. “가요 같지도 않고 기존의 상투적인 뮤지컬 음악과도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조성과 리듬”을 직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뒀다. 그는 “‘하나의 우주’를 척추 삼아 모든 세포의 테마와 유미의 솔로 넘버로 가지가 뻗어나갔다”고 했다. 109라는 세포의 탄생을 통해,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이 완결된 음악적 우주를 구축한 것이다.

세포들이 움직이면 유미가 변한다…선후 바뀐 플롯

뮤지컬에서 유미는 주인공이면서 주인공이 아니다. 웹툰이나 드라마와 달리 유미는 한편으로 물러나 있다. 김 작가는 “초반에 비하면 유미 분량이 굉장히 많아진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캐릭터 ‘109’를 발굴해 서사의 숨통을 틔웠지만, 500화가 넘는 원작의 방대한 에피소드에서 무엇을 남기고 버릴지는 여전히 막막했다. 직장 생활과 연애사,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을 무대 위에 일일이 나열하다 보면 세포들의 내면세계는 협소한 코러스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창작진이 던진 승부수는 상식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역발상이었다. “세포가 진짜 주인공인 뮤지컬이라면, 아예 유미를 무대에서 지워버리자.”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결과는 뼈아픈 실패였다. 현실 세계의 유미가 사라지자 무대 위 세포들의 분투는 허공을 맴돌았고, ‘유미의 세포들인데 유미가 없으니 서사를 이끌어갈 구심점이 사라진다’는 치명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였다. 이 실패가 뮤지컬만의 독창적 서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창작진은 원작 텍스트가 지닌 오랜 관성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유미의 세포들’의 작업을 하기도 전부터 웹툰의 오랜 팬이었다는 김 작가는 “원작에선 유미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세포들이 부산스럽게 반응하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바로 이 인과구조를 뒤집었다. ‘세포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내면의 충돌과 변화의 결과로 현실의 유미가 달라진다’는 전체를 세운 것이다.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견습 세포 109는 세포마을의 변두리로 밀려난 마이너 세포들을 만나며 성장통을 겪는다. 109가 소외된 세포들의 상처를 보듬고 자존감을 회복해 나가는 치열한 내적 파동이 유미의 성장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김 작가는 “원작의 인과관계를 전복시켜 세포들의 행동에 따라 유미가 변화하는 구조로 대본을 재설계했다”며 “109가 세포들을 만나며 변화해 가는 과정과 유미가 현실에서 자신을 긍정해 나가는 과정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냈다”고 설명했다.

파격적인 구조 전환에 확신을 불어넣은 것은, ‘유미와 세포의 만남 장면’이었다. 최재광 작곡가는 김 작가가 써 내려간 ‘조우의 신’을 마주했던 2024년 봄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최 작곡가는 “그 장면을 딱 보는 순간 연출진에 ‘이제 됐다’고 했다. 이 한 장면만 있으면 작품의 모든 구조적 난제가 한번에 해결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최 작곡가에게 유미가 세포마을로 들어서 109와 시선을 맞추는 장면은, 현실과 판타지가 만나는 순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뼈아프게 반성할 때도, 깊은 위로가 필요할 때도, 새로운 결심을 굳힐 때도 결국 인간은 자기의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며 “유미가 세포마을에서 109를 만나는 것은 한 인간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내면과 온전히 대면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유미의 잊힌 ‘자존감’을 상징하는 109와 유미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한 사람이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끌어안으며 자존감의 실체를 회복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최 작곡가는 “이 결정적인 장면이 탄생한 순간, 비로소 엔딩을 향해 뻗어가는 작품 전체의 골조와 음악적 줄기가 선명하게 보였다”고 했다. 무대에서 유미를 아예 지워버리려 했던 창작진의 실험은, ‘유미’를 통해 한 사람의 내면 풍경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의 시행착오였던 것이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왼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왼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원작에도 없던 세포들의 계급, 왜?

시종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공동체였던 세포마을. 이제 보니 영락없는 인간 사회다. 세포 마을은 서슬퍼런 계급 사회였다. ‘메이저(Major) 세포’와 ‘마이너(Minor) 세포’라는 두 계급이 치열하게 맞붙는다. 특히 마이너 세포는 주변부의 신세로, ‘눈치 없이’ 나대다가 메이저 세포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다.

꽤나 ‘급진적’인 이 설정은 2차원 웹툰의 문법을 3차원 공연 예술로 변환하고자 만든 ‘극적 장치’였다. 김 작가는 “원작 웹툰은 주간 연재 특성상 에피소드 중심의 단편적 구성에 유미의 돌발 행동에 대한 세포들의 리액션”이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이 구조를 무대 위로 가져올 경우 인물 간의 갈등이 평면화되고 극적 긴장감이 휘발될 수밖에 없었다.

김 작가가 바라본 것은 ‘내면의 그림자’였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멋진 모습이 있다. 이성적이고, 쿨하며, 화려한 패션 감각이나 당당한 사랑 같은 것이 바로 세포마을의 기득권을 쥔 메이저 세포들“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최악’을 상상하는 ‘불안 세포’, 매번 헛다리를 짚는 ‘명탐정 세포’, 남사스러운 욕망을 분출하는 ‘응큼 세포’, 질척이고 매달리는 ‘구질구질 세포’, 현실의 벽 앞에 잊힌 ‘작가 세포’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라고 김 작가는 설명한다. 내게서 소외된 감정과 꿈, 욕망이 마이너 세포로 자리한 것이다.

뮤지컬은 견습 세포 109가 세포마을의 변두리로 쫓겨난 마이너 세포들의 공간인 ‘응큼 클럽’이나 ‘우울 처리장’, ‘무의식’을 차례로 탐색하며 서사가 이어진다.

마이너 세포라고 해서 마냥 위축된 모습은 아니다. 음악 역시 어둡지 않다. 김 작가는 “명탐정과 불안, 109가 함께 부르는 음악이 오히려 밝고 통통 튀어서 좋다”며 “핍박받으면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마이너 세포들을 일종의 ‘품바’처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마이너 세포들의 밝은 모습은 109와 유미를 변화시키는 자존감의 한 부분이었다.

김 작가는 “자존감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잘나고 반짝일 때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미워하고 수치스러워하며 외면하고 싶었던 결핍과 못난 구석까지 온전히 내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109가 마이너 세포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여정은 결국 현실 속 유미가 상처를 끌어안고 진정한 자아 통합으로 나아가는 심리적 화해의 과정인 셈이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주요 배역 히스테리우스도 사라져

가장 극적인 변화는 쇼케이스 단계까지 서사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적대자)인 ‘히스테리우스’의 삭제다.

원작에서 유미의 히스테리를 담당하며 강력한 빌런 역할을 수행했던 히스테리우스를 제거하겠다는 결정은 창작진 내부에서도 엄청난 모험이자 리스크였다. 최 작곡가는 당시를 돌아보며 “처음엔 이걸 빼면 풀기가 굉장히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전부터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악역의 존재’는 주인공과 직접적인 충돌을 유발해 플롯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전개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그러나 “선명한 악역을 세워두고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가니, 무대가 아동극이나 만화영화처럼 유치해지는 한계에 부딪혔다”며 “무엇보다 ‘히스테리우스 역시 유미라는 인간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감정 세포 중 하나인데, 왜 이 세포만 모두에게 영원히 미움받아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었다”고 돌아봤다.

작가의 결단은 현명했다. 창작진은 외부의 악당을 무찌르는 권선징악의 도식을 버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통제력을 잃고 맹목적인 집착이 될 때 벌어지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갈등의 엔진으로 삼았다.

최 작곡가는“할리우드식의 전형적인 악당 구도를 과감히 탈피해 인간 내면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정의 결을 담아낸 모던하고 세련된 대본이 완성됐다”며 극찬했다.

대본에서 히스테리우스는 사라졌지만, 완전히 존재를 감춘 것은 아니다. 그는 음악 안에 존재했다. 최 작곡가는 히스테리우스 캐릭터를 위해 미리 작곡해 둔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4분의 5박자와 8분의 6박자의 변박 선율을 사랑 세포의 폭주신에 이식했다. 남자친구 구웅과의 관계에 집착해 이성을 잃어가는 클라이맥스 신에서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진 곳에 ‘변형된 음악’을 타고 감정의 극단적 충돌이 빚어지며 무대는 서스펜스를 입었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오른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오른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유미의 세포들에 바그너가 숨어 있다?

통통 튀는 K-팝, 브로드웨이 쇼뮤지컬의 경쾌한 음악에 독일 낭만주의가 한 스푼 더해졌다. 최 작곡가는 사랑 세포의 맹목적인 환상과 집착을 담기 위해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에 등장하는 불멸의 명곡 ‘신부의 합창(결혼행진곡)’ 모티브를 사랑 세포의 메인 테마 기저에 교묘하게 숨겼다.

그는 “사랑 세포가 품은 궁극의 열망은 결국 구웅과의 완벽한 결합인 ‘결혼’이었다. 순진무구하면서도 위험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바그너의 결혼행진곡 선율을 발라드 풍으로 변형했다”고 했다.

멜로디는 한 번 쓰고 사라지지 않는다. 1막에서 이 테마는 관객들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장치다. 웅이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랑 세포의 달콤하고 낭만적인 설렘으로 흐르며 등장한다. 하지만 관계의 균열이 일어나는 2막에선 조성을 바꿔 파국의 불협화음으로 만든다. 최 작곡가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결국 비극으로 끝나듯, 사랑의 환상이 깨어지는 비극성을 동일한 멜로디의 전조를 통해 청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고전 오페라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f·유도동기)’ 기법의 완벽한 차용이다.

최 작곡가는 작품 전반에 걸쳐 수많은 라이트모티프를 촘촘한 그물망처럼 던져뒀다.

유미의 대표 솔로 넘버에는 109의 메인 테마인 ‘원오나인(109)’의 멜로디, 흘러가는 시간을 재촉하는 째깍째깍 시계 효과음이 음악적 모티브로 결합됐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유미의 내면 깊은 곳에 109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청각적으로 인지한다. 명탐정 세포 테마와 합창곡 ‘리와인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기억을 집요하게 되감고 추리하는 명탐정 세포의 시그니처 멜로디는 세포 전체가 웅장하게 합창하는 ‘리와인드(Rewind)’의 중심 모티브로 확장된다. 서사의 추진 동력이 되는 곡이다.

뮤지컬 넘버 안에 국악 장단도 끼어들었다. 발랄하고 트렌디한 현대 팝 스타일로 편곡된 촉 세포의 넘버를 통해서다. 한국 전통 무당의 신내림과 예언을 상징하는 자진모리 변박이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엉뚱한 추리를 남발하는 명탐정 세포는, 극의 결정적인 전환점마다 109의 진짜 정체와 유미의 심리를 꿰뚫는 대사를 던지며 치밀하게 복선 회수의 역할을 해낸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샘컴퍼니 제공]

티파니 “유미 넘버가 너무 어두워요”…곡 새로 써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은 책상 위 박제된 고정 텍스트가 아니었다. 연습실과 무대에서 배우들의 날숨과 창작진의 치열한 피드백을 거치며 끊임없이 진화한 ‘살아있는 유기체’였다.

유미의 솔로 넘버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최 작곡가가 당초 작곡했던 유미의 넘버는 처연하고 비장한 감성이 지배하는 어두운 단조의 곡이었다. 그러나 유미 역으로 캐스팅된 배우 티파니 영과의 대화에서 ‘곡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최 작곡가는 “티파니 씨가 음악을 듣고 ‘곡 자체는 너무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비극적이고 운명론적으로 슬프다, 유미라는 인물이 지닌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생명력이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매우 스마트하고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해 줬다”며 “어두운 단조를 밝고 당당한 장조로 수정해 총 네 번에 걸쳐 곡을 완전히 새로 썼다”고 말했다. 배우의 직관과 창작자의 수용이 만나 넘버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촉 세포의 변신도 ‘협업의 결실’이다. 사실 촉 세포는 초기 대본에서 영화 ‘사랑과 영혼’의 오다 매 브라운(우피 골드버그 분) 같은 전형적인 무당이었다. 자칫 올드하고 진부해질 수 있다는 연출부의 우려가 나왔다. 최 작곡가가 ‘촉 세포’ 넘버를 톡톡 튀는 상큼한 음악으로 던지자, 김 작가는 여기에 ‘야식은 치킨이야’, ‘우리 모두 뒤질 거야’ 같은 위트 넘치고 발칙한 현대적 언어를 입히며 지금의 ‘촉 세포’를 완성했다.

앙상블 세포들의 대사와 넘버 배분 역시 ‘깎아내기의 연속’이었다. 김 작가는 “20명이 넘는 세포 배우들에게 일일이 솔로 넘버를 줄 수 없는 물리적 한계 속에서, 각 세포에게 2~4마디의 짧고 강렬한 시그니처 단어를 부여해 존재감을 살리고 싶었다”며 “대본을 고치면 음악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면 안무 동선이 달라지며, 안무를 보고 다시 음악을 매만지는 5년간의 매주 회의가 있었기에 이 촘촘한 톱니바퀴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오른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최재광(오른쪽) 작곡가, 김가람 작가. 윤창빈 기자

무수히 많은 대사와 노래가 세포들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유미’로 향한다. 전지적 세포 시점으로 다시 쓴 ‘유미의 세포들’의 최종 목적지는 유미인 것이다.

최 작곡가는 “무대 위에 울려 퍼지는 모든 세포의 노래는, 결국 유미라는 한 인간이 품은 다채로운 영혼의 독백”이라고 했다. 그는 음악을 스케치하고 편곡하는 내내 “이 노래를 유미가 자신의 목소리로 온전히 부를 수 있는가”를 중심에 뒀다. 신나는 마음에 화려한 옷을 걸치는 패션 세포의 선율도, 억눌렀던 욕망의 응큼 세포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 방황하던 109도, 결국 유미라는 한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내면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극의 말미 현실의 유미가 세포마을로 들어가 109 세포와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붙이는 그 순간을 김 작가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했다. 그는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는 세계관”이라며 “내 안의 수많은 세포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상처 입으며 연대할 때, 비로소 ‘나’라는 광활하고 온전한 우주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1막 피날레 넘버를 쓸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김 작가는 뱃속의 작은 생명을 향해 느꼈던 절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감정을 109가 유미에게 바치는 러브레터에 쏟아부었다고 고백했다. 2020년 모든 것이 멈춰 섰던 코로나19의 암흑기 속에서 절망했던 최 작곡가는 “이 작품의 음표를 채워 넣으며 비로소 내면의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받았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쓴 무대는 2030 관객들을 쓰다듬었다. 네이버 평점 4.8(5점 만점), 인터파크 놀티켓 평점 9.8(10점 만점). 30대 주인공 유미를 따라 30대 관객(35.4%)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관객들의 평들도 한결같다. “기대 없이 갔다가 울고 웃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고 후기를 적었다. 두 사람은 바로 여기에 ‘유미의 세포들’의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불완전해서 눈부시고, 방황하기에 아름다운 2030 청춘의 자화상에 건네는 담담한 위로다.

“우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이나 남들의 시선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소중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며, 우리 각자는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고 존귀한 ‘하나의 우주’입니다.” (김가람, 최재광)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