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터널이 붕괴됐다. 한 남자가 매몰됐다.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다. 정부가 나서 구조작업을 펼친다. 대규모 인력과 장비가 투입된다. 그러나 작업은 진척이 되지 않는다. 매몰된 남자와의 연락이 끊긴다. 그의 생존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 국민들의 피로도도 쌓인다. 마침 인근에선 터널 신축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정했던 폭파작업이 구조활동으로 인해 지연된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터널 개통이 늦어질수록 국가ㆍ지역 경제의 손실도 불어난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구조 노력을 계속할 것인가, 터널 신축을 위한 폭파작업을 시작해야 하는가. 여론조사는 폭파 지지가 다수다. 구조작업은 그만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붕괴된 땅 속의 주인공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는 결국 구조를 포기하고 폭파 버튼을 누른다.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터널’이다. ▶‘터널’, 여론조사, 프레임의 정치학

영화는 ‘여론조사’가 정부의 결정에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근거로써 활용됐음을 암시한다. 그 여론조사는 어떤 문항으로 돼 있을까.

여론조사에서 ‘질문’이 어떻게 답변을 좌우하는가는 이미 유명한 주제다. E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다큐프라임’에서 3부작으로 지난 2012년 방영한 ‘킹메이커’ 시리즈의 제작진이 실험을 했다. 거리에 투표판을 설치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틀간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주제의 설문조사를 했지만 질문을 바꿨다. 사회 인프라의 민영화를 주제로 한 설문이었다. 첫날은 “‘KTX 일부구간’을 사기업에 매각하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서울 강남역과 인천 구월동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합친 결과 찬성 27표, 반대 200표가 나왔다. 이튿날엔 ‘고속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에 찬성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찬성 171표 대 반대 160표로 결과가 정반대로 뒤집혔다.

이 실험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프레임의 정치학’과 ‘여론조사의 신뢰도’라는 문제다. ‘프레임’에 대해선 학자마다 다양한 개념 규정이 있지만 대체로 미디어에 의해 제시된 ‘현상을 해석하는 사고의 틀’이라고 할 것이다. 미디어의 언어와 영상을 통해 선택ㆍ배열ㆍ재구성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치도 ‘프레임 싸움’이다. 최근 여당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에서 담긴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결정 과정을 두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야당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야당은 미르ㆍK스포츠재단의 설립 특혜 의혹, 최순실씨의 대통령 비선실세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며 청와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여야 공방 속에서 새누리당은 당내 기구로 ‘대북결제 요청사건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고, 민주당은 ‘비선실세 국정농단 편파기소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북결제’와 ‘비선실세 국정농단’이 여야가 제시하는 ‘프레임’이다.

▶여론조사, 여왕인가 매춘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극중에선 과연 어떤 질문으로 여론조사가 이뤄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이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비극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영화 속에서 어떤 여론조사가 이뤄졌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 가능하다. 여론조사가 터널 시공사와 지자체, 관련 정부 부처의 이해를 반영해 이뤄졌고, 여론조사 질문 또한 구조작업의 지연으로 인한 터널 신축공사 중단이 부르는 경제적 손실을 강조하도록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이로 인해 여론조사에 참여한 국민들은 실제로는 살아있는 매몰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살인의 공범자’가 될 뻔했다.

과연 여론조사는 믿을 수 있는가. 지난 4ㆍ13 총선은 여론조사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정치 이벤트였다. 투표일 직전 리서치 기관과 언론은 여론조사에 기반해 새누리당은 157∼175석, 민주당 83∼100석, 국민의당 28∼32석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실제로는 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11석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은 총선 이후 탈당파들이 복당하면서 현재 129석으로 민주당을 제치고 제 1당이 됐다.

총선 이후 여론조사의 신뢰도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비판이 들끓었다. 여론조사의 폐해와 무용성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앞다퉈 제기됐다.

그러나 새누리당과 민주당 당대표 경선 등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원 투표 뿐 아니라 일반 국민 여론조사가 여전히 주요한 제도로 활용됐다. 한국갤럽과 리얼미터 등 국내 리서치 회사가 주간 단위로 발표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정당별 지지도,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등은 언론의 주요한 보도 대상이 되고 있다. 국내 정치에서는 일반국민 여론조사가 특히 대통령 후보 경선을 비롯해 국회의원 공천은 물론 당지도부 경선에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정당이 당원이 아닌 일반국민의 여론조사를 주요 공직자 후보ㆍ당직자 선출의 근거로 쓰는 데는 전문가들이 이미 비판적인 지적을 적지 않게 해왔다. 여론조사의 부정확성도 문제이지만, 국내 정당 제도의 ‘후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취임 후 최악 여론, 박근혜 정부

여론조사 자체에도 정치학계의 오랜 논쟁 중의 하나다. 과연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에 기여하는가, 아니면 조작에 취약하고 편견을 강화하는 부정확하고 얄팍한 정치술수나 미디어의 상품인가. 이에 대해서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신문방송학)가 인물과사상사 블로그에 쓴 ‘왜 여론조사를 ‘현상 유지를 위한 매춘’이라고 하는가? : 조지 갤럽’을 참고할만하다. 이를 보면, 프랑스 계몽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여론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여왕이며 그것은 국왕의 권력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국왕들은 바로 이 여왕에게 직접 시중을 들어야 하는 노예이다”라고 했다. 미국 정치학자 V.O.키는 “여론에 대해 정확히 말한다는 건 성령(聖靈)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여론조사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은 언론학자 허버트 실러의 한 마디가 대표적이다. 그는 “여론조사는 현상 유지를 위한 매춘”이라고 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지지도와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21일발표(18~20일 조사)한 박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25%로 이 업체의 조사로는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부정 평가는 64%로 역시 취임 후 최고치다. 새누리당 지지율은 29%로 역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과 동률을 이뤘다. 그동안은 새누리당이 내내 앞섰다.

주간 정례 조사를 하고 있는 또 다른 리서치회사 리얼미터의 조사결과는 같은 추이를 보여줬다. 리얼미터가 지난 20일 발표(17~19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박 대통령 국정지지도는 27.2%로 역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새누리당 지지율은 아예 2위로 내려앉았다.

여론조사에 대한 설왕설래도 많고 무용론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순기능도 만만치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제도나 기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이 문제일 것이다. 여론조사도 쓰임새가 문제가 해석이 문제일 것이다. 여론조사에 대한 숱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최근 박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여론의 추이는 모종의 메시지를 띄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론이 보내는 ‘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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