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 국제무대 통용개념 아냐…한미 인식차 커 -‘국제규범ㆍ통념’ 강조하는 美와 이례적 안보환경 강조하는 北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북한 비핵화와 맞물려 한반도 정국을 뒤흔드는 단어가 있다. 종전선언. 한자로는 終戰宣言. 영문으로는 ‘Declaration of End to Korean War’이다.

종전선언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종전선언은 공식적인 외교용어가 아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과정에서 ‘종전선언’은 개념상 1953년부터 65년간 지속해온 정전협정 체제에 마침표를 찍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에 앞서 행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다시 말해, 공식적인 북미 관계정상화 절차를 밟기 위한 논의의 시작을 알리는 정치적 선언이다. 1989년 냉전(冷戰ㆍCold War)의 종식을 알린 몰타 미소(미국과 소련)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착안해 개념화한 것이다. 몰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됐던 냉전을 사실상 종식한 정상회담으로, 미소 정상은 체제를 서로 인정하고 군축회담 및 안보블록 해체에 들어갔다.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차= 종전선언을 ‘한반도 평화체제를 시작하기 위한 입구’라고 생각하면 당장 이틀 뒤인 7ㆍ27 정전협정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굳이 선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종전선언을 북핵협상 과정에서 북한에 제시할 ‘카드’로 인식하면 더욱 그렇다. 애초에 많은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새로운 관계를 선언하면서 종전선언도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없이는 종전선언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미 간에는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시각은 엄연히 다르다. 한반도 전문가들은 “종전선언은 그저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것”이라며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실질적인 변화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미국의 보수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선언에 불과한 종전선언이 동북아정세를 요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공화당 인사들은 북한이 비핵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면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승인하는 결과가 초래돼 국제사회가 구축한 비확산 체계가 붕괴된다고 주장해왔다. 또, 비핵화에 앞서 한미군사동맹의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미 안보 전문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본지에 “북한이 비밀리에 핵물질을 지속 생산하고 교착상태에 있는 협상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등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행동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평화가 왔다고 선언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종전선언을 하려면 많은 전제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아직 그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미국 워싱턴의 시각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증명한다. 25일(현지시간)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이달 초 방북에 앞서 미 언론은 정보당국을 인용해 북한이 비밀리에 핵ㆍ미사일 시설을 가동하고 있으며, 핵분열성 물질을 여전히 생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관련 질문은 이날 청문회에서도 나왔고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이 핵분열성 물질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고 답했다.

종전과 교착의 데자뷔= 미국은 그동안 북한을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왔다. 미국에 있어 북한은 유일하게 핵 비확산조약(NPT)체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깨버리고 핵보유에 나선 정권이다. 벼랑 끝 전술을 바탕으로 국제사회 질서를 뒤흔들고 혼란을 야기하는 무법정권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이 시각을 깨고 북한을 동등한 대화상대로 인정한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미 내부 반발이 거세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협상 과정에서 ‘양보를 하고 있지 않다’(not making concession)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강조했다. 북한의 핵보유를 체제보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동등한 협상주체로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문재인 정부의 접근과 다른 것이다.

북핵협상 과정에서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미묘한 기싸움은 노무현 정부때도 있었다. 9ㆍ19 공동성명채택 이후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사태로 북핵협상이 결렬될 위기에 처한 가운데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베트남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청와대는 ‘종전선언’이라는 이벤트를 구상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남은 터라 역사적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이해가 얽혀 수월하게 풀릴 것으로 예상됐다.

2007년 6자회담 2ㆍ13 합의가 조금 진전을 보이자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더 높아졌다. 현 북미 비핵화 협상보다 훨씬 진전된 단계에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2ㆍ13 합의를 채택한 뒤 같은 해 6월 원자력총국장 명의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서한은 “방코 델타 아시아은행(BDA) 자금 문제 해결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영변의 핵시설 가동 중지 및 감시 절차를 토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초청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당시 북한이 시리아에 핵 관련 기술을 유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시리아 사막지대에서 북한의 영변 핵시설과 흡사한 구조물을 발견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시리아에 핵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지만 테러지원국 및 적성국 제재명단에서 해제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종전선언을 북한의 완전한 핵포기에 앞서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2007년 9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방미해 종전선언을 촉구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해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 안보체제를 달성할 수 있다”며 우회적으로 거부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10ㆍ4 합의에 종전선언에 대한 문구가 담겼지만, 그해 11월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종전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종전선언 협의 당사자에서 중국을 제외할 수 있다며 대중협상력을 높이고,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갑작스럽게 방남시켜 우리 정부에 종전선언을 성사시키라고 압박했다.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갑작스럽게 2박 3일 일정으로 방남해 노 대통령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이재정 당시 통일부장관 등과 만나 종전선언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2ㆍ13 합의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와 불능화에 대한 검증문제와 미국의 지지부진한 테러지원국 대상 해제검토로 파행의 길을 걸었다. 종전선언에 대한 논의도 북미 간 깊은 불신만 남기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2007년 실패로 끝난 종전선언 시도는 북한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차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2018년 7월. 정부는 8~9월 남북미 종전선언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내 회의론을 점점 강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지만, 미국 내 회의론의 확산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북미 협상내용을 법제화할 수는 의회에서는 벌써부터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내 만연한 회의론을 두고 일각에서는 기존 엘리트들이 트럼프 행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무조건 반발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끓는 여론에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이다. 미국의 거센 회의론과 반발도 뚫고 나갈 명분을 강화하고 납득시켜야 종전선언의 정당성도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종전선언은 2007년과 마찬가지로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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