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안개가 자욱한 무대 위에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움직인다. 어둡기도 했거니와 무대에 가득 깔린 포그 때문에 그 형체는 눈으로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뿌연 연기 속에서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 검은 물체는 무대 위를 이리저리 누비는데, 마치 바다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괴물을 연상시켰다. 천천히 움직이는 데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엄습해오는 극도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도리어 그 형체를 더욱 응시하게 만들었다. 마치 관객을 뒤덮을 듯 객석 가까이 다가왔다가도 금세 방향을 틀어 퇴장 할 것 같이 무대 옆으로 이동하는데, 관객들은 긴장을 놓지 못하고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오브제는 바람에 부피가 부풀어 오르는 형태의 집채만 한 대형 튜브였다.
그렇게 움직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물체가 지나간 자리에 전신을 탈의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용수가 나타났다. 마치 어떠한 상황을 사진으로 포착해 놓은 듯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어느새 검은 물체가 무용수를 삼키고 지나간다. 한순간에 사라진 무용수는 그렇게 또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무용수는 혼자였다가 두 명이 됐다가 세 명 그리고 여섯 명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라진 인간. 환각인가, 환영(幻影)인가, 아니면 어떤 메시지인가. 알 수 없는 존재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감 그리고 초조함은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간의 모습은 억압,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연상된다.
무용수들은 검은 물체를 관객을 향해 던졌고, 객석 마지막 줄까지 갔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땐 이미 쪼그라든 상태였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검은 물체는 힘을 잃었으나 그 존재의 잔상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공연은 내내 검은 물체에 투영시켜 놓은 이미지와 탈의한 인간 본연의 육체를 통해 상징성을 띤 파편만을 전달한다. 그렇게 던져진 파편들을 엮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보는 이의 상상이 더해지면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 작품은 국제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난민과 이주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의 거대한 물체와 인간의 존재는 이 시대의 거대자본주의 혹은 사회가 낳은 폭력과 인간의 모습, 이방인에 대한 시선과 두려움, 유럽의 난민과 이주 문제를 은유한 것이다.
이 공연은 제21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2018)의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서강대메리홀 대극장, 10월 1일~2일)이다. 시댄스(SIDance)는 매 해 세계 각지를 대표하는 저명한 무용단들이 대거 참여하는 가운데 축제의 개막작은 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이번 개막을 장식한 이 공연은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작품으로, 안무자 피에트로 마룰로는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안무가다. 2018년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무용플랫폼 에어로웨이브즈(Aerowaves-Dance Across Europe)에서 올해의 안무가로 선정됐고,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은 덴마크, 스위스, 미국, 대만 등 올 한 해만 세계 각국으로부터 15여건의 초청을 받았다.
vicky@heraldcorp.com
![앤트로픽 IPO는 시작일 뿐…AI 모델 ‘골라주는 시장’ 커진다 [서학개미 주식회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3/rcv.YNA.20260813.PRU20260813276001009_T1.jpg?type=h&h=240)
![“교과서 미래엔 AI가 있다”…‘AI 공장’된 미래엔 세종공장 [그 회사 어때?]](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2/news-p.v1.20260821.9213ff47283443e4aeec745e2b971c31_T1.jpg?type=h&h=240)
![일본서 사라진 인플레 ‘명목 앵커’…물가·엔화에 중요한 이유 [츠토무 와타나베]](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816.209013b3297d4c92ab32710d529f3877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