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간 춤이야기 펼친 스타 무용수
10년전 ‘장소 특정적 공연’ 선도
익숙한 공연장 탈피...8개 공간으로
40대에 자기다운 춤 ‘원형하는 몸’
순환하는 원...나이 들며 본연으로
10년 후에도 시리즈로 이어갈 것
모든 움직임은 ‘하나의 의미’로 이어진다. 어느 ‘공간’에서든 차진엽의 몸짓은 ‘지금의 자신’을 보여주는 현재이면서, 지나온 과거인 동시에 나아갈 미래의 단초다.
“몸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빌어 말로 전달하지만, 언어만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몸으로 하는 예술은 그것을 담고 있어요.”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태우는 차진엽(42·콜렉티브A 예술감독)은 현대무용계의 ‘스타 무용수’로 불린다. 과거 ‘댄싱9’(엠넷)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의 안무감독을 맡아 한 번 더 주목받았다. 차진엽은 무대 위에선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이지만, 무대 밖에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한 호수’ 같다. 그저 ‘재밌어서’, 일곱 살에 춤을 시작해 30여년이 지났다. 시간이 길이가 쌓은 날들은 오롯이 그의 춤이 되고 있다.
■ ‘장소 특정적 공연’…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시도
차진엽의 이야기(춤)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2012년, 한 사람의 창의적 시도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는 ‘장소 특정적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을 선도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무용수로도 공연을 하지만, 어느 순간 관객으로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 설레지 않더라고요.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형식이 지루하게 다가왔어요. 어떤 작품이 올라오든, 무슨 공연이 벌어지든 공연장이라는 장소에 가는 것이 흥미롭지 않았던 거죠. 내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도 그렇게 느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공간의 변화’를 통해 ‘공연의 형식’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은 ‘로튼 애플(Rotten Apple)’이라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익숙한 공연장을 벗어나 8개의 공간으로 구성, 전시의 형식을 접목했다. 공간이 달라지자 관객도 변화를 맞았다. “그간의 공연에서 관객은 익명의 상태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수동적 자세로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였다면, 이 공간에선 관객에게 자유의지를 줘 선택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때부터 공간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어린 시절 책상 밑에 들어가 비밀요새”를 만들고 자기만의 스토리를 구상하던 경험이 그의 춤을 완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됐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놀면서 만든 기억들이 창작에 중요하게 들어오고 있어요. 내가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엔 더 확장해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제 작업의 정체성이자 뿌리거든요.”
9년이 지난 현재, 차진엽의 고민에서 시작된 ‘공간을 벗어난 무용’은 익숙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형식 자체를 새로 만들거나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됐어요. 작품 자체, 그 안의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저에겐 형식과 공간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거죠.”
지금도 새로운 공간과, 달라지는 형식의 변화를 고민한다. 팬데믹으로 공연장의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코로나19를 맞으며 무용은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영상으로 향하고 있어요. 이전엔 선택이었던 것이 이젠 필수가 됐어요.” 꾸준히 필름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에게 영상은 장단점이 많다고 한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시각적으로만 치중하게 된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무용은 시각과 청각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에요. 제가 공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객의 경험인데, 영상 안에 담기니 관객에게 다른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힘들어졌어요. 추구하는 방향과 달라 어떻게 춤을 출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요. 풀어야 할 문제죠.”
■ 원형·본질의 탐구…‘나다운 춤’을 찾은 시기
공간의 변화는 형식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탐구한 작품은 차진엽의 춤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로 이어진다. 차진엽의 모든 작품들은 현대무용가로 걸어온 그의 삶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는다.
발레를 해오다 고등학교 때 현대무용을 선택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후, 그는 언제나 ‘진보적인 안무가’로 꼽혔다. 호기심과 끊임없는 탐구는 그의 창작의 원천이다. 20대의 무용수 차진엽은 누구나처럼 자신의 재능을 고민하기도 했고, 무용수의 성별의 다름에 부딪히기도 했다. “강인한 여성들을 주제로 삼거나, 남성적 춤을 보여줬던 작품”이 “여성의 이미지나 선입견을 깨기 위해 춘 춤”이었다.
40대가 된 지금, 가장 ‘자기다운 춤’을 찾아가고 있다. 그것이 차진엽의 대표작인 ‘원형하는 몸’의 출발이기도 하다. 지난달 다시 선보였던 ‘원형하는 몸:라운드1’은 물의 순환 과정을 보여주며 ‘원형’의 의미를 전달한다. “원형은 원의 형태이기도 하고, 본질이자 본연의 모습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원의 형태가 시작돼 제자리로 돌아가 순환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몸도, 우주도 그러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타고난 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원형하는 몸’은 차진엽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나의 핵심, 내가 추구하는 것,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오다 원점으로 돌아와 몸에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원형하는 몸’을 만들며 마음가짐은 인생의 챕터2를 여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표현은 다르고, 작품은 다르게 완성되지만 제가 하는 모든 작업들은 서로 연결돼있어요.” 최근 선보인 ‘DMZ문화예술삼매경 리:메이커(Re:maker)’, 유니버설 발레단과의 협업도 그 연장이다.
10년 후의 차진엽은 이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생각이다. “‘원형하는 몸’을 주제로 시리즈처럼 길게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올 하반기엔 ‘원형하는 몸:라운드2’를 선보일 계획이다. 해마다 전성기인 것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지금은 “무용수이기 전에 여성으로서도 나이듦에 대해 고민”하는 때이기도 하다. “10년 전에 했던 동작을 지금 할 수는 없겠죠. 누구나 전성기는 있지만, 그 전성기에 빠져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인 것 같아요. 그 시기에 머물러 ‘내가 왕년에’ 이런 이야기가 멋지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어요. 현재 살고 있는 모습, 현재의 내 몸을 알아차리고, 지금의 몸에 맞는 움직임을 발견해 꾸준히 해나가고 싶어요. 지금의 상태에서 최선을 찾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차진엽은 무용수는 ‘솔직한 직업’이라고 했다. “몸에 생각과 마음을 담으니 어떨 땐 알몸을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 삶에 떳떳하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차진엽이라는 사람, 그것이 정체성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 삶이 곧 작품이고, 제 삶과 닮아있는 작품을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나다운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욕심이라면, 죽기 전에 예술가로서 마스터피스(인생작)를 남기고 싶은 것, 더불어 어른으로서 사회에 좋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죠. 그런 생각을 해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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