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소녀· 젊은 여성의 인신매매 무역

에도시대 쇄국정책에도 가라유키상 활동

16세기 대항해시대 노예매매와 연결

日정부 직간접 간여· 방임하에 성노예로

[북적book적]일본군 위안부의 뿌리는 日중세관습인 ‘인취’와 ‘난취’
“위안부와 강제징용 제도는 거시적으로 볼 때 중세 시대 일본의 인취와 난취, 왜구의 조선인과 중국인 납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연행, (…)유럽 상인과 군인들에 대한 가라유키상 제도 등과 연결된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일본의 노예’에서). 서울시‧서울대 연구팀이 2019년 공개한 일본군 위안부 실물 사진.

“일본 군부와 정부는 일본의 매춘 제도, 노예무역으로서의 성노예 매매, 그리고 해외의 일본 윤락녀인 가라유키상 제도를 종합하여 군대내 위안소 제도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의 전통적 관습과 국가 시스템에 기반을 둔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검사로 20년, 변호사로 15년을 일해온 박태석씨는 최근 펴낸 ‘일본의 노예: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역사의 진실’(월드헤리티지)에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 위안부와 강제징용 제도가 일본의 중세시대의 전쟁 관습인 ‘인취’와 ‘난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적book적]일본군 위안부의 뿌리는 日중세관습인 ‘인취’와 ‘난취’

저자가 찾아낸 일본의 인신매매와 성노예의 역사는 8세기 나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녀라 부르는 매춘부가 이 때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폭력이나 기망, 유혹, 인신매매의 방법으로 어린 소녀일 때 끌려와 성노예 생활을 했다. 이런 일이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지고 전국의 도시와 교역루트를 따라 이동·확산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신매매는 더욱 성행했다.

일본의 윤락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오사카안에 유곽을 처음 만든 주인공이다. 뒤 이어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는 1617년 도시의 외곽에 유곽을 설정했는데, 일본 최대의 요시와라 유곽은 한 때 수천 명의 유녀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녀들은 죽을 때까지 유곽을 떠나지 못했는데, 평균 수명은 23세였다.

뒤 이어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라 문을 걸어잠그는 쇄국정책을 폈지만 나가사키의 일부 지역은 네덜란드상인과 중국인에게 개방하고, 윤락녀의 출입을 허용했는데, 이들을 통칭 가라유키상이라 불렀다.

가라유키상은 근대 들어 일본에 서양상인들이 왕래하면서 해외 진출이 이뤄지게 된다. 주로 중국 상하이,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 수마트라, 태국, 인도네시아 등 유럽 식민지였던 아시아 국가들로, 유럽이나 미국 군대 주둔에 따라 수요가 많았던 곳들이다.

본격적인 윤락알선업자들이 등장한 건 19세기 에도 시대 후기로, 가난한 부모들로부터 매수하거나 취업 사기 등 기망의 방법으로 해외 포주들에게 매매했다. 메이지시대 근대화과정에서 희생된 가라유키상은 역설적으로 외화벌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일본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지는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20년경이 되면 가라유키상은 국가의 수치로 바뀌어 퇴출되고, 국가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저자는 일본의 소녀와 젊은 여성의 인신매매 무역에서 시작된 가라유키상은 일본의 식민지 및 상업적 확장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직간접 간여와 방임하에 외국 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의 성노예 역할을 했다며, 일본군 위안부도 이 제도를 참고해 마련한 군 위안소라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 일본 군인과 일본 제국을 위한 전쟁의 성노예였다고 주장한다.

성노예는 인간사냥, 인신매매와 연결돼 있다. 저자는 14세기 왜구가 벌인 조선인과 중국인 납치와 인신매매, 대항해시대 일본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벌인 노예매매의 역사도 살핀다. 세계적인 노예무역 성행과 함께 14,15세기 왜구는 인간사냥과 인신매매에 맹위를 떨쳤는데, 주로 한반도와 중국 산둥반도 등지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들을 납치, 일본 각지나 류큐 왕국 등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16세기 후반에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선교사들과 상단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서부 지방 영주들은 전쟁포로와 옆동네 주민, 주변국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노예로 팔고 화약과 총을 구입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유럽을 비롯, 세계각지로 팔려나갔다. 1578년 리스본의 대규모 노예 밀집 지역에선 중국인과 일본인 노예도 상당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 소녀들이었다. 1582년 가톨릭 다이묘들이 로마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신학교에 다니던 4명의 13~14세 소년들을 유럽에 파견한 덴쇼 소년사절단의 보고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많이 눈에 띈다. 유럽 각지에서 50만이라고 한다. 피부가 희고 잘생긴 일본 처녀들이 비소가 드러나 농락당하고 노예들의 나라에까지 팔려나가는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노예무역은 1543년부터 1595년까지 극성을 부렸다.

저자는 임진왜란도 노예전쟁으로 규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특수부대는 후방에서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했는데 이때 10만명이 끌려갔을 것으로 본다. 특히 정유재란은 노예사냥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조선의 남녀를 납치해갔다.

히라노와 나가사키는 한반도에서 연행한 조선인들을 매매하는 등 세계 유수의 노예시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예매매를 금지하자 일본인들을 노예로 팔기 어려워진 일본인 다이묘들이 조선인들을 납치해 나가사키에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매매한 것이다. 이들은 헐값에 팔려나갔는데 그 수가 많았던 것도 이유로 지적된다. 저자는 이런 역사적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중 조선의 젊은 남녀들을 끌고 가 강제징용 노동자나 일본군 위안부로 삼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국수주의나 배타주의를 경계하며, 오직 사료와 문서, 증언을 토대로 삼고, 국제인권침해 기준을 적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역사적 맥락과 실태, 전후 처리 문제를 꼼꼼하게 따져나간다. 목적은 ‘네버 어게인’,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돼서는 이유에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일본의 노예/박태석 지음/월드헤리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