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충무로 연출부 생활 두번째 작품 만에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곽재용 감독의 데뷔작 ‘비오는 날 수채화’ 조감독을 하던 때였는데, 도제시스템을 거슬러 직접 돈을 끌어모아 일찍 첫 영화를 찍게 된 곽 감독은 스탭들로부터 무시받거기 일쑤였다. 박 감독은 “형이 괴로워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과연 저런 것까지 참고 견디며 꼭 감독을 해야만 하는 걸까’하는 회의가 밀려왔다”며 “촬영이 거의 끝나갈 때쯤 그냥 관둬버렸다”고 했다. 박 감독은 이미 곽 감독의 등에 칼을 한번 꽂은 적이 있는데, 함께 연출부 생활을 하던 때였다. 제작부장의 폭행사건으로 연출부 모두 그만뒀는데, 박 감독만은 “영화사측의 회유에 넘어가 다시 현장으로 기어들어갔다”.

류승완 감독은 중학교 때 10개월 간격으로 부모님을 여의면서 “비교적 잘 살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였고, 가난을 짊어지고 밥 대신 전학을 밥먹듯 다녀야 했다. 고교 때 동시상영관의 영화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친구들과 의기 투합해 영화를 만들자고 했으며, 대장이 좋아 감독이 되겠다고 했다. 드디어 카메라와 영사기를 사들고 처음 만든 단편영화가 초등학교 류승범이 데뷔한 작품이었는데, 촬영 첫날 류승범이 카메라를 툭 쳐서 부서지고 말았다.

한국 영화감독 17인의 좌충우돌 데뷔기를 엮은 책이 출간됐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이 기획하고 영화평론가 주성철이 인터뷰를 옮긴 ‘데뷔의 순간’이다.

동료들을 배신하고 혼자 몰래 현장에 복귀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계 입문 시절 이야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형 애니메이션 데뷔작이 있었다는 봉준호 감독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겼다.

특히 각자의 ‘증언’ 속에 서로 교차하는 순간들이 흥미롭다. 박찬욱 감독은 연거푸 3편을 ‘말아먹고’, 류승완은 박찬욱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기에 오매불망 데뷔를 꿈꾸던 감독 지망생 봉준호가 더해지고, 그런 그들을 감독 데뷔작으로 쓴 맛을 본 제작자 이준익이 서로 다독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정윤철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 방위병 시절 후배와 고참 자격으로 만난 일화도 있다.

이 밖에 김경형, 김대승, 민규동, 방은진, 변영주, 양익준, 이해영, 임순례, 장철수, 한지승, 허진호 감독 등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