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물 밑’으로 돌아온 밴드 이날치
판소리 다섯마당 바탕 넘어선 신작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천문학자”
창작 스토리에 새로운 음악 실험
“이날치는 퓨전국악 아닌 팝밴드…
재밌는 음악이 우리의 방향성”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물 밑’에서 응축된 일곱 음악인의 ‘음악적 세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베이스 둘(박준철 장영규)에 드럼 하나(이철희), 소리꾼 넷(권송희 신유진 안이호 이나래). 서로 다른 음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만남은 절묘했다. 2019년 세상에 나온 ‘범 내려온다’는 ‘1일 1범’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도무지 춤을 추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베이스 리듬이 심장을 쿵쿵 울리고, 호랑이 같은 소리꾼들이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발산한다. 잘게 쪼개진 리듬 위를 미끄러져 다니는 현대무용 그룹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까지 등장하자, 장면 장면마다 시청각의 ‘강렬한 충격’이 따라왔다.
이날치가 돌아왔다. ‘조선팝 아이돌’, ‘진정한 국힙(대한민국 힙합)’으로 불리는 밴드다. 이번에도 ‘홀리는 음악’이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벗어났다는 점. 익히 알려진 판소리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했다.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천문학자”의 여정을 담은 11곡이 내년 상반기 정규 2집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음반으로 나오기 전 오는 28~30일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관객과 만난다. 공연의 제목은 ‘물 밑’이다. 이날치의 데뷔 앨범 ‘수궁가’도 2018년 음악극 ‘드라곤킹’이 출발이 됐다.
이날치의 리더 장영규(베이스)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이날치는 판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그것이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판소리를 버리고 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수궁가’를 꺼내와 이날치의 음악이 만들어졌지만, 새로운 음악을 할 때 적벽가, 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가져오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인가 생각해보게 됐어요. 우리가 할 역할은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음악을 바탕으로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를 바탕으로 이날치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장영규)
음반 작업을 위한 첫 단계는 ‘스토리텔링’이었다. 장영규와 ‘시련’ ‘장 주네’ ‘백치’ 등의 작품을 함께 해온 공연 연출가 박정희와 멤버 권송희(보컬), 지난해 합류한 박준철(베이스)이 이야기를 구성했다. 두 멤버는 가사 작업도 함께 했다. 박준철은 “멤버들이 ‘생명의 탄생’을 주제로 소재를 모으고, 여러 이야기를 써오면 이를 토대로 연출님이 줄거리를 만들었다”며 “노래는 별개로 존재하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보컬 안이호는 “‘수궁가’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이야기도 더 잘 들릴 것”이라고 했다
이날치의 새 앨범엔 새로운 실험과 변주가 나오고, 소리꾼의 노래와 서양 악기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사운드에 있어선 “조금 더 사이키델릭하고, 록적으로 변화”(장영규)했다. 신디사이저, 탬버린, 퍼커션을 쓰고 “공연에선 쇠와 볼을 두드리며 자연적인 소리”(박준철)도 더한다.
보컬의 창법도 이전과는 변화가 생겼다. 새 음반의 작업은 멤버들 안에서 저마다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이전에는 제가 하고 있는 판소리라는 장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게 과연 판소리다운 것인지, 스스로 고민과 질문을 던졌어요. 지금은 전통적인 것을 꼭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이 사운드 안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찾아갔어요. 이번 작업에선 새로운 창법을 쓰며 점점 더 (새로운 시도에) 열리게 됐어요. 보컬들도 내가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됐어요.” (이나래)
새로운 창법의 시도는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나래는 “판소리의 묘미는 기교에서 나오는 깊은 맛에 있는데, 이번엔 그것을 덜어내고 담백하게 불렀다”며 “가성이나 속삭이는 창법도 시도했다. 판소리에선 쓰지 않는 창법이라 더 다채롭게 들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치의 등장은 전혀 다른 두 음악세계에 단단한 연결고리를 채워줬다. 대중과는 늘 멀리 있었던 전통음악과 우리 소리는 서양의 악기와 만나 새로운 음악세계를 만들었다. 사실, ‘전에 없던 시도’는 아니다. 1980년대 처음 시작된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낯선 만남’은 1990년대 황신혜밴드, 어어부프로젝트 등 국악의 정서를 받아들인 홍대 인디신에서 피어났다. 2010년대 이후엔 고래야, 잠비나이, 씽씽, 악단광칠 등의 팀과 함께 음악적 가능성을 확인했다. 전통음악의 실험은 이날치를 계기로 새 전기를 맞은 셈이다. 그 중심엔 어어부프로젝트부터 비빙, 씽씽을 이끌어온 장영규가 있었다.
장영규를 주축으로 한 밴드는 등장 당시부터 한결같이 “이날치는 퓨전국악이 아닌 얼터너티브 판 밴드”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전통음악이 아닌 ‘오늘의 음악’을 하는 밴드이자,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밴드로 존재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담은 것으로 읽힌다.
“퓨전국악에도 수없이 다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분류가 퓨전국악 카테고리 안에 있는 다른 팀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넣은 것인지, 국악인이 속한 밴드이기에 넣은 것인지 음악적 판단이 없는 분류라고 생각했어요. 퓨전국악이라는 디테일을 쓰고 싶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얼터너티브 팝으로 대체했던 것 같아요.” (장영규)
해외에선 이들의 음악을 특정 장르로 구별하지 않고, 그저 ‘팝 음악’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는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에 쓰인 뒤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지난달엔 영국·네덜란드·헝가리·벨기에 유럽 4개국 5개 도시 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영국에선 세계적인 밴드 U2와 콜드플레이 음반들을 프로듀싱한 브라이언 이노가 관람했다. 그는 “소리가 음과 음 사이를 자유롭게 미끄러지듯이 왔다갔다 한다”며 이날치의 홍보대사가 됐다. 이노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를 콜드플레이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 사람(이노)에겐 판소리가 소중하고 가치있는 한국의 전통음악이 아닌, 독특한 음악적 요소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사실 음악의 가치라는 건 음악을 감상하는 데에 방해라고 생각해요. 전통의 음악적 가치를 묻지 않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힘이 되더라고요.” (안이호)
많은 밴드가 쉽게 가지기 힘든 ‘빅 히트곡’을 냈지만, 이날치의 음악 여정이 ‘꽃길’만은 아니다. 장영규는 “국내 대중음악 범주에서 밴드 음악은 제외돼 있다”며 “밴드 음악은 모두 인디로 치부하는 데다, 밴드가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라고 했다.
“‘범 내려온다’를 통해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화제와 관심이 사라졌을 때 밴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요. 그건 지금도 똑같은 상황이고요. 이날치가 어디에서 존재할 수 있을지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해외를 찾게 되는 것도 팝 시장 안에 밴드가 포함돼 있고, 그곳에선 팝 음악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에요.” (장영규)
새 음반 ‘물 밑’의 작업은, 이날치의 음악적 방향성과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 있다. 안이호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 할 수 있는 제일 재밌는게 뭘까 항상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판소리도, 전통을 살리는 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가요 흉내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함께 모여 가장 재밌는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옳은 방향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목표가 있다면, 드럼 치는 (이) 철희 형님이 환갑잔치 할 때까지 활동하는 거예요.(웃음)”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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