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정주영 개인전

황혼녘의 하늘은 쉽게 검어지지 않는다.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정이 될 때 까지 하늘에서는 색의 향연이 열린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황혼녘의 하늘은 쉽게 검어지지 않는다.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정이 될 때 까지 하늘에서는 색의 향연이 열린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산과 산이 품은 바위만 20년 넘게 그려, ‘산의 작가’로 불리던 그는 어느 순간 시선을 확장했다. ‘산 너머 혹은 산 위에 공간’에 빠져들었다. 무한으로 열려있는 하늘과 모양이 잡혀있는 듯 하지만 늘 변하고 형체가 없는 구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 봉우리나 바위를 그릴때는 특징적인 형상이 있었어요.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나 특정 사물을 닮았다든지 하는.. 이름이 붙는 과정도 흥미로웠죠. 산수 혹은 풍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걸 관찰하고 연결해서 회화로 나타냈는데 이번 작품들은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심지어 덧없는 것들에 대한 시선입니다”

회화작가 정주영(54)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2017년 동 갤러리에서 개인전 이후 6년만이다. 북한산의 바위에서 다양한 형상을 좇던 작가는 형상을 넘어 본질에 다가간다. 형태는 없으나 존재하는 것들. 하늘과 구름, 바람이 그 주인공이다. 전시 제목인 ‘그림의 기후’(Meteorologica)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기와 물, 땅에 관한 여러 기후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기술한 책 ‘기상학’(Meteorology)에서 따왔다. 제목처럼 날마다 변하는 날씨와 그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포착한 이번 작품들을 통칭한다.

일몰 전의 해는 이지러지고 폭발하며 점차 사라진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일몰 전의 해는 이지러지고 폭발하며 점차 사라진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1층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작품(M19)은 일몰에 점차 형체가 흐릿해지며 소실되는 태양의 모습이다. “무겁고 화려하게 천천히 지는 해를 오래도록 명상적으로 느껴보길 바랐다”는 작가는 해가 지는 것을 레퀴엠에 비유한다. 화성이 쌓여 장엄한 느낌을 주는 레퀴엠처럼 색이 쌓여 영원과도 같은 찰나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작가는 여러 색을 겹치고 또 겹쳐 빛이 만들어낸 색감을 표현한다. “칠을 지우는 과정”을 통해 형태가 없는, 그래서 재현 불가능한 대상을 포착한다.

옆에 걸린 ‘M21’은 일몰의 몽환적인 하늘풍경이다. 해가 사라질때 하늘을 물들이는 노랑, 주황, 파랑, 보라색 등 수 만 가지 색의 스펙트럼을 담아냈다. 일몰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림 왼쪽에 걸린 작은 캔버스엔 검은 하늘의 달이, 오른쪽의 캔버스엔 빛이 살짝 남은 밤하늘이 걸렸다. 생동감 넘치는 일출을 묘사한 작업은 2층에 걸렸다. 일몰과 거의 흡사하게 느껴지지만 옆에 걸린 캔버스에 핑크색으로 물든 하늘이 나란히 걸려, 새벽시간임을 알린다.

일출의 하늘은 일몰의 그것과 꼭 닮았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일출의 하늘은 일몰의 그것과 꼭 닮았다.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먹구름을 묘사한 M40, M41.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먹구름을 묘사한 M40, M41. 정주영 개인전 '그림의 기후' 전시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먹구름을 묘사한 M40, M41도 인상적이다. 먹구름을 어둡게만 표현하기보다 레이어를 겹쳐 탁하지만 깊이 있는 질감과 긴장감 넘치는 회색으로 표현했다. 한편 지하층에는 알프스의 산에서 시작해 추상으로 넘어오는 중간단계의 그림들이 자리잡았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늘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추상이며 구상이다”라고 설명한다. 선으로 대표되는 형태에 천착했지만 형태는 늘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은유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는 완벽하게 색으로 구성된 추상작업으로 보이나, 자세히 살피면 들풀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끝이 없는 하늘이, 인간과 하늘을 매개하는 구름이 보인다. 색으로 빚어낸 변화무쌍함, 그 황홀한 변주는 3월 26일까지 이어진다.

정주영 작가 [헤럴드DB]
정주영 작가 [헤럴드DB]

vick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