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한상원 발탁
장르ㆍ분야 아우른 음악성
‘기생충’ㆍ‘오징어게임’으로
세계적 음악가로 발돋움
데카서 데뷔 앨범 ‘리슨’ 발표
서울시향 판즈베던 러브콜 ‘화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음악을 사랑했지만, 시작은 노동이었어요. 지금도 예술이라는 건 수많은 노동 중의 하나라고 봐요. 그래서 예술가에게 결여된 근면함이나 책임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미 오래 전 ‘천재 음악소년’으로 불렸다. 1995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재즈아카데미에 들어가 작곡과 편곡을 배웠다. 그 시절 기타연주가 한상원의 눈에 띄며 ‘한상원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프로 데뷔였다. 그 때가 고작 중학생이었다. 중딩의 이력은 제법 화려했다. 이듬해엔 ‘푸리’의 리더이자 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원일을 만나 영화 음악도 작업했다. ‘나쁜 영화’(1997년)와 ‘강원도의 힘’(1998)에 OST에도 참여했다.
“뮤지션을 꿈꾼 적은 없어요. 그저 중학생이 경제생활을 하기가 힘든데 어떤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잡고 싶은 절실함이 (당시) 있었죠.”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생존’이었다.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하지 않았던 예술은 정재일의 음악세계를 확장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적이 리드보컬이고, 한상원이 기타를 연주한 그룹 긱스로 1999년 데뷔했다. 당시 정재일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그의 작업은 장르와 분야를 망라한다. 공연계에선 연극, 뮤지컬, 창극을 넘나들었고, 가요와 재즈, 국악을 자유롭게 활용했다. 박효신과의 오랜 작업으로 팬덤도 탄탄히 구축했다. 과거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정재일은 “콘서트에 와주시는 많은 분들 중 상당수가 박효신의 팬들이기도 하다”며 몸을 낮추기도 했다. 이젠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세계 무대가 주목하는 음악가가 됐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의 삽입곡 ‘소주한잔(A Glass of Soju)‘은 아카데미 주제가상 부문의 ‘예비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21년엔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할리우드 뮤직 인 미디어 어워즈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한국인 최초로 수상이었다.
정재일이 ‘자신의 음악’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 석 자를 내건 앨범은 ‘리슨’(LISTEN). 지난해 6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속한 세계적 유명 레이블 데카와 계약한 뒤 선보이는 첫 앨범이다.
공식석상에 잘 나서지 않는 정재일은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무대 뒤에서 예술가들을 백업하다가 이렇게 혼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자연과 인류애 메시지 담은 새 앨범 ‘리슨’
데카 데뷔 앨범에선 ‘자연과 인류애’의 메시지를 피아노 중심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구현했다. 앨범의 제목을 ‘리슨’으로 결정한 데에도 많은 고민과 이유를 담았다.
“통속적이고 단순하지만 ‘리슨’이라고 결정했어요. 전 원래 다른 예술을 위해 작업하기에 듣는 사람이기도 해요. 내 안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듣고 싶었고, 사람들의 말도 듣고 싶었고, 지구가 하는 말도 듣고 싶었어요.”
나와 타인을 넘어 우리를 둘러싼 세계, 지구를 향한 경청의 가치를 음반에 녹였다. 정재일은 “우리가 사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며 “팬데믹과 그에 따른 비극적 이별, 그리고 전쟁이 터지는 것을 보고 ‘우리가 듣는 귀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선공개 싱글 ’더 리버‘(The River)를 비롯해 ’리슨‘(Listen), ’오션 미츠 더 랜드‘(Ocean Meets The Land) 등 총 7곡이 담겼다. 노르웨이에 위치한 유명 작업실인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 피아노 연주를 녹음했다. 현악 사운드는 ’기생충‘·’옥자‘ 작업에 참여한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피아노는 제 모국어나 다를 바 없어요. 말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더 편해요. 제게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악기를 고르고자 했어요. 제 첫 음반이기도 하고 더 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오롯이 혼자 이야기할 수 있는 편성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생충’, ‘오징어게임’ 그 후…데카의 선택’
공연계, 대중음악계는 물론 영화계까지 한국 대중문화에서 정재일은 이미 중요한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다 준 것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서다.
“‘기생충’이라는 영화 때문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기에 직접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어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으로) 명예를 얻었고 ‘성덕’(성공한 덕후)이 될 수 있었어요. 너무나 존경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브로커’로 작업할 기회도 생겼고요.”
데카가 정재일에게 음반 작업을 제안한 것도 두 작품이 계기가 됐다. 그는 “20여년간 다른 예술가들을 보필하는 역할을 해오다가 작년에 데카에서 당신만의 것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넉살 좋게 흔쾌히 승락하진 않았다. 오래전 실패(?)의 기억도 떠올랐다.
사실 정재일의 솔로 데뷔 앨범은 2003년이었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며 ‘눈물 꽃’을 발매했다가 아직 역량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꿈을 접었다”고 했다. 이번 앨범은 20년간 꾹꾹 눌러둔 꿈을 다시 꺼낸 작업이기도 하다.
“2003년이 떠올라 망설였는데, 다행히 팝송을 만들라는 요구는 없어서 마음을 바꿨어요. 클래식 전문 레이블이라서 그동안 제가 쌓아왔던 것을 바탕으로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했어요.”
그의 음악 자체가 클래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중음악을 넘어 바흐, 브람스, 아르보 패트르의 색채가 정재일의 음악 안에 있다. 정재일은 가장 처음 좋아한 클래식으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꼽았다.
“레퀴엠 스코어를 보면서 많이 공부했고, 라벨과 드뷔시, 아르보 페르트와 같은 음악가를 알게 됐어요.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를 위한 애가’는 듣고 충격에 빠졌죠. 루치아노 베리오, 진은숙 등의 현대 음악가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고요.”
정재일을 규정하는 틀이 없기에 세계적인 거장들도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보낸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비싼 지휘자로 꼽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차기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 역시 그에게 공식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정재일은 “위촉곡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며 “그런 거장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셨을지, 굉장히 황송한 제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음악을 배운게 아니라 근본이 없다. 그들의 예술적 경지를 맞출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근본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있으니 해보라고 하면 하고 싶은 작은 소망은 있다”고 화답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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