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1)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자, 내일이면 저기 보이는 다리로 경주 차들이 줄줄이 달려서 북한 땅으로 들어설 거란 말이지? 꽤 볼만 하겠어. 북한이 경주 길을 개방하다니 엄청난 사건이야. 저기 세계 각국에서 모인 방송국 사람들 좀 봐라. 카메라 설치할 자리 잡느라고 정신이 없구나.”

“그럼요, 아버님. 보나마나 도일 씨가 1등으로 달려 나가겠지요? 전 세계로 방송을 타게 될 거예요. 너무 자랑스러워요.”

“내 아들… 도일이가 1등으로 북한 땅을 밟게 될 거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권 씨 가문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게지.”

권일주와 유한솜은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국경다리 앞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물론 권일주는 휠체어에 앉은 채였고, 유한솜은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랠리 카들이 통과하게 될 국경다리 어귀에는 중국 공안들과 세계 유수의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중국에서도 랠리 카들이 북한 땅을 통과하게 될 것이란 소식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다. 권일주와 유한솜도 그 뉴스를 보고 중계일정에 맞추어 단둥으로 찾아와 인근 호텔에 여장을 풀었던 것이다.

“아버님, 보나마나 도일 씨가 1등으로 들어오고… 그 뒤로 우리 호성이 오빠가 따라 들어올 거예요. 둘이서 경주 실력이 막상막하니까요.”

“그래? 물론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잔뜩 들떠있는 유한솜의 목소리를 들으며 권일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어느새 비극으로 가득 찬 운명을 탓하고 있었다. 경기에 출전하기 전날, 자기를 찾아온 권도일에게 부탁했던 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기필코 사막 한 가운데에 원수의 아들을 파묻어달라고 했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 원수의 아들이 하필이면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는 어여쁜 처녀의 친오빠라니…

“아버님, 우리 오늘 밤, 여기에서 새울까요?”

“여기에서 밤을 새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맨 앞자리를 차지해야지요. 내일이면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고 버텨야지요. 저기 방송국 사람들처럼 말예요.”

“그럴까? 나야 괜찮다만, 너는 춥지 않을까? 배도 고플 테고…”

“아버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여기 가방에 아버님 코트와 담요를 넣어 왔어요. 간식거리도 조금 챙겨왔고요. 그럼 우리 밤 새워서 기다려요. 아침까지 기도하면서 말예요.”

권일주는 눈을 감은 채 내일 벌어질 일을 예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들 권도일의 집요한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권도일은 유호성을 말짱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유호성은 의도된 사고로 인해 이미 목숨을 잃었거나, 혹은 중환자 상태로 병원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얘야,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내 아들 도일이가 내일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어쩔 셈이냐?”

“어머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도일 오빠를 믿습니다, 아버님.”

“그럼… 만약에 네 오빠 유호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우리 오빤 좀 나약하거든요? 랠리경기는 벌써 포기하고 밤새 술타령이나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유한솜은 깔깔거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권일주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만 있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꽃다운 아가씨가 원수 가문의 아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 애비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하물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고 되돌리기도 싫은 일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결판 날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권일주의 시름만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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