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작품이 잘 되려면 그 안에서 캐릭터마다 각자의 사이즈가 있어요. 이번 드라마는 제가 여기서 욕심을 부리면 드라마 자체가 망가져요. 다 각자의 사이즈가 있는 거예요. 이번엔 지성 오빠를 밀어주기로 했어요.”

지난달 MBC 수목드라마 ‘킬미, 힐미’의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황정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려 1인 7역을 소화하는 배우 지성의 극과 극 연기가 빛을 발할 수 밖에 없는 드라마이기에, 기자들의 질문 역시 한결같았죠. 지성만 주목받는 것이 서운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사실 드라마 현장에서 배우들 간의 신경전에 얽힌 비화는 꽤 자주 들려옵니다.

그들간의 힘겨루기는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그들 간의 시작됩니다. 남녀 주인공의 멜로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다른 한 쪽이 부각되는 뉘앙스의 제목일 경우 배우들은 캐스팅 과정에서 ‘제목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죠.

지난해 한국과 중국에 ‘도민준 열풍’을 몰고왔던 SBS ‘별에서 온 그대’도 대표적입니다. 전지현은 당시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14년 만의 안방극장 컴백작으로 ‘별그대’를 선택하며 “처음엔 드라마 제목이 ‘별에서 온 남자’라 남자주인공만 부각되는게 아닌가 싶어 고민을 했다”며 “성별이 구체적이지 않은 제목으로 바뀌니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배우들에게서 찾기 힘든 솔직한 모습이었죠. 이런 일은 대체로 뒤에서 들려오기 마련이거든요.

지난해엔 한 주말드라마에 톱여배우가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의 안방극장 복귀였죠. 그런데 제목이 또 문제였습니다. 극중 딸부잣집의 첫째딸로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이 여배우는 드라마 제목이 막내딸의 이름을 따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나봅니다. 요즘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들이 심심치 않죠. 중의성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 배우의 요구로 제목이 바뀌게 됐다고 관계자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오래만의 복귀이나 과거부터 누려왔던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도 확인해야했겠죠. 또 보여줘야 했을 겁니다.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여배우들 간의 신경전은 말할 것도 없죠. 미니시리즈의 경우 짧은 시간 더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은 ‘정쟁’과도 같습니다. 반사판 한 장 더 대는 것 역시 여배우들이 기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많죠. 반사판 두 장은 언제나 여주인공의 몫입니다. 화면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대 배우와의 피부톤 차이 정도야 자신이 더 예뻐보이면 된다는 배우들 앞에선 불필요한 논쟁거리일 뿐이죠.

여배우들 사이에서의 일먼은 아닙니다. 남자배우들끼리도, 남녀 배우들 사이에서도 흔한 신경전이죠. 다시 황정음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황정음은 지난해 SBS ‘끝없는 사랑’을 마친 이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현장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처음 ‘사이즈’ 론을 폈습니다. “드라마에선 각자가 해줘야할 사이즈가 있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겁니다. 당시 황정음은 원톱 여주인공을 맡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굴곡진 인생을 연기했죠. 여주인공 황정음에게 당시의 현장은 욕심 많은 배우들의 신경전이 넘쳤다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이 여배우, 워낙에 솔직한 탓에 누군가에겐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담겨있었죠. 지나고 보니 그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자신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라고요.

지난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황정음은 ‘킬미, 힐미’를 시작할 당시부터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철저하게 지성을 위한, 지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력자 역할을 하겠다는 거죠.

물론 다소 과장된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드라마에서 천역스럽게 캐릭터를 소화하고, 또 적절한 사이즈로 자리하는 덕에 황정음 역시 돋보이는 결과가 됐습니다. 이젠 남자주인공 지성처럼 1인 7역에 가까운 캐릭터를 선보입니다. 지난 5일 방송분이었습니다. 일곱 살 나나, 열일곱 살 여고생 안요나,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 자살 중독 고교생 안요섭, 나쁜 남자 신세기와 제1인격 차도현을 상대하는 오리진도 한 마디로 6인분의 연기를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인격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상대하더군요. 여고생 요나와는 머리끄덩이를 잡고, 요섭이를 대할 때는 자상한 누나가 됩니다. 페리박과 함께일 땐 걸그룹 출신 여배우의 과거를 마음껏 자랑합니다. 차도현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랄한 오리진이고, 신세기에겐 어떻게든 살살 구슬리고 달래야할 짝사랑 그녀죠.

자신의 캐릭터를 과하지 않을 만큼 욕심낸 덕분일까요. 황정음이 노상 달고 다니는 사이즈 론이 적절했나 봅니다. 요즘 이런 말이 유행이라죠. ‘지성’이면 ‘정음’이라고. 두 사람은 지난 2012년 인기리에 방송된 KBS2 ‘비밀’을 통해 3사 안방극장을 평정한 재회커플입니다.

드라마 관계자들은 ‘잘 만든 드라마’, ‘좋은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단지 대본과 연출, 연기의삼박자를 이루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딜 가나 ‘신 스틸러’는 있는 법이지만, 배우들끼리 서로 돋보이기 위해 물고 뜯을 때 드라마도 방향을 잃게 된다는 거죠. 시청자가 그걸 모를리 없겠죠. 자기 자리에서 적당한 역할을 소화해줄 때 조화를 이룬 드라마가 나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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