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스
영국 영화 ‘필스’는 한국 영화로 말하자면 ‘투캅스’의 조 형사나 ‘공공의 적’ 시리즈의 주인공인 강철중의 ‘내면’을 냉정하고 무자비한 시선으로 파헤쳐본 듯한 작품이다. 부패하고 타락했으나 사건 해결에 탁월한 수완을 가진 형사의 이중적인 행태와 심리 속을 파고 들어가며 혐오와 연민, 경멸과 동정, 분노와 냉소의 모순된 감정을 빚어낸다. 심리와 사건 묘사, 희극과 비극, 코미디와 스릴러가 결합된 드라마는 어빈 웰시의 동명 원작소설과 존 S. 베어드의 연출,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가 빼어나게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중년의 형사 브루스 로버트슨(제임스 맥어보이 분)은 오로지 돈과 진급에만 관심이 있으며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이지만, 매번 빼어난 수완으로 사건 해결에 탁월한 성과를 이뤄내는 형사이기도 하다. 승진인사 발표를 앞둔 어느 날, 아시아계 유학생 청년이 밤길에 불량배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유일한 목격자는 지나가던 금발의 여인이다. 브루스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승진을 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사건 수사를 해가는 한편으로, 브루스는 경찰 조직 내 유력한 진급 경쟁자들을 함정과 계략에 빠뜨려 하나 둘씩 탈락시켜 간다.
윗선의 신임을 얻은 브루스는 진급을 확실히 보장받는 듯하지만, 막판 예기치 않은 걸림돌이 나타난다. 아만다라는 신참 여형사가 등장해 브루스가 사건 수사 중 유일한 목격자인 금발 여인의 존재를 묵살한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결국 표류하던 사건 책임을 아만다가 대신 맡게 되고, 브루스는 형사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에 처한다.
브루스가 맞닥뜨리는 고비마다 여인들이 등장한다. 가장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여인은 브루스의 아내이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는 적이 없다. 늘 섹시하고 신비로운 자태로 나타나 독백하듯, 쇼를 하듯 홀로 무대를 채우며 남편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담은 동작과 대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브루스가 정작 발길을 하는 곳은 진급 경쟁자이기도 한 동료 형사의 부인으로, 함께 침대에서 뒹굴며 불륜의 욕망을 채운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존재는 브루스가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이다. 길거리를 가던 중 한 남자가 사고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행인 중 브루스가 나서서 구조를 시도한다. 남자는 죽었지만, 그 곁에 있던 남자의 부인이 브루스에게 감사의 정을 표한다. 그 여인은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브루스가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순수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했던 순간 마주친 존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시아계 청년 사망 사건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수수께끼의 금발 여인이 있다. 과연 그녀는 브루스와 무슨 관계이기에 사건 수사 중 은폐가 됐을까? 브루스와 금발 여인의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 주인공의 부패 행각과 술ㆍ마약 중독, 여성 편력의 기원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불행한 결혼생활이 브루스를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브루스 로버트슨은 야망과 탐욕, 죄책감, 인정욕구로 인해 스스로를 나락과 고통으로 빠뜨리는 현대판 ‘맥베스’다. ‘필스’는 부패한 형사가 등장하는 스릴러나 누아르에 셰익스피어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어 인간 내면의 혼란과 악마적 본성을 그려낸, 독창적인 심리 드라마이자 냉소적인 코미디다. 21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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