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봉화] 기와를 머리에 인 흙담이 사각형으로 집을 둘러싸고 밤하늘엔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마당에 서서 전통한옥의 정취에 빠져들어 본다. 밝은 별들이 이 흙마당에 죄다 쏟아질 것 같다.
고즈넉한 한옥 그리고 솟을대문 사이에 서서 잠시 아파트와 견줘봤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주택(아파트)과 장인의 정성으로 만든 수제품(한옥)의 차이 같다. 오로지 흙과 돌과 나무로만 만든 집이다.
조선 선비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한 날이다. 고풍스런 전통한옥의 건축미와 멋에 취해 보고싶은게 1차 목적이었다. 두터운 콘크리트벽과 강화유리로 막힌 아파트생활에서 벗어나 한지 한 장으로 바깥 공기와 경계를 지은 한옥체험, 물론 어릴 때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긴 했지만 오랜만에 접하니 이젠 ‘체험형 숙박’이 됐다.
필자는 이번 봉화 여행에서 꼭 고택탐방을 하고 싶었다. 더 편리한 숙소를 마다하고 다소 불편할 수 있는 고택을 전화로 예약했다. 주말 숙박이라 이미 ‘좋은 방’은 다 예약이 됐다고 했다. 행랑채 군불 때는 방 하나가 남아 잡았다. 대신 조금 저렴했다. 바로 솟을대문 옆방이다.
이날 충북 괴산을 거쳐 오느라 저녁때가 돼서야 고택에 도착했다. 마침 마당에 주인 강백기(姜百基ㆍ69) 선생이 계셨다. 강 선생님은 이미 군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해놓으셨다.
짐을 내리고 뜰을 거닐며 고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만산고택(晩山古宅), ‘선비의 고장’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소재한 이 고택은 올해로 딱 135년된 집이다. 강 선생님은 만산 선생의 4대손이시다. 우선 집의 전체적인 구조와 의미들을 설명하셨는데 조선 사대부 가옥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조선말 고종 15년(1878)에 문신인 만산 강용(姜鎔ㆍ1846~1934) 선생이 지었다. 동향인 입구에 11칸짜리 행랑채와 솟을대문이 있다.
솟을대문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임금님이 계시는 근정전에 올라가서 정사를 논할 수 있는 반열이 돼야 한다는 것. 만산 선생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11칸이나 되는 행랑채는 곧 부(富)를 상징하는데 이 집은 옛날 만석꾼으로 불렸다고 했다.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대청마루,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감실로 이뤄져 있다. 이 사랑채와 붙어 ‘ㅁ’자 형으로 안채가 뒤로 배치돼 있는데 이 ‘ㅁ’자 구조는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며 집의 안정감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ㅁ’자 내부 마당에 시멘트 바닥을 한 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안채 역시 안방과 대청, 건넌방, 부엌 등이 있다.
사랑채에서 마당을 향하면 오른쪽에 아담한 서당이, 왼쪽에는 담을 하나 더 쳐서 너머에 별당을 갖췄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모여 조선시대 가장 전형적인 사대부의 가옥구조를 갖췄다는 평가다.
춘양목으로 지은 기둥은 130년이 지난 아직도 끄떡없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아파트도 30년이 지나면 부식하고 균열이 생겨 재건축하겠다고 난리 아닌가.
사랑채는 당시 강용 선생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면 맨 오른쪽에 ‘晩山(만산)’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만산은 강용 선생의 호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지었고, 이 현판도 친필로 써줬다고 한다. 그렇게 듣고 보니 시선이 한참 오래 머문다. 힘있는 저 필체, 높으신 어른이 이 시골집에 편액했다는 현판이니 다시 볼 수 밖에. 만산이란 ‘대기만성’을 뜻한다.
현판에 갑자기 관심이 끌리기 시작했다. 혼자 봤으면 대충 ‘현판이 있구나’하고 넘어갔을 것을, 쓴 사람과 뜻을 새기고 나니 재미가 생겼다. 잠시 현판 공부를 이어갔다.
만산 강용 선생은 대원군과 친분이 돈독했다고 한다. 만산 선생은 영릉참봉,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장을 두루 지냈고 1905년 이후에는 망국의 한을 풀고자 자택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국운회복을 기원했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이것 말고도 현판이 3개가 더 있다. 만산 현판 왼쪽으로 ‘靖窩(정와)’, ‘存養齋(존양재)’, ‘此君軒(차군헌)’이 나란히 있다. ‘정와’는 당시 뛰어난 서예가 강벽원 선생이 썼다. ‘조용하고 온화한 집’을 뜻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고요 정’ 자를 써서 ‘靜窩’라고 쓴 현판도 있다고 한다. 의미는 같다.
‘존양’은 ‘본심을 잃지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란 의미로,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도 이 표현이 등장한다. 3.1운동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의 글이라고 했다.
‘차군헌’은 조선후기 서예가인 권동수의 글로 ‘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역시 선비풍의 용어를 현판에 차입했다.
뒤에 붙는 ‘재’와 ‘헌’ 등은 ‘집’을 의미하는 말들이다. 조선시대 한옥이나 궁궐 등 건물 이름에는 모두 ‘전(殿)-당(堂)-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 등의 글자가 붙는다. 모두 ‘집’을 뜻하는데 ‘전’은 근정전ㆍ석조전ㆍ중화전 등 처럼 주로 임금이 사용하던 집에 붙인 말이다. 나머지는 격에 따라 순서가 있긴 하지만 구별이 좀 모호하다는게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자녀들의 공부방이었던 서당에는 오른쪽 방문 위에 권동수의 ‘書室(서실)’ 현판이 있고 왼쪽 방문 위에는 ‘翰墨淸緣(한묵청연)’이라는 현판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 한묵청연을 잘 보자. 한묵청연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8세때 쓴 글씨다. 어쩌면 여덟살이 저렇게 멋지게 글씨를 쓸 수 있을까. ‘한묵’은 문필(文筆)을 뜻하고 ‘청연’은 ‘맑고 깨끗한 인연’을 의미한다. 현판은 이렇게 함축적이고 의미깊은 말들로 돼 있다.
강 선생님은 이곳의 주요 현판은 도난 때문에 모두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걸린 현판은 탁본이다. 진품을 못본게 마냥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난 당하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이 든다. 강 선생님도 “남 기자 처럼 이렇게 일부러 찾아온 사람한테 진품을 못보여 주는게 못내 아쉽다”고 말씀하신다.
담 너머 별채로 갔다. 칠류헌(七柳軒)이다. 이 건물의 용도는 손님이 오면 모시는 장소, 즉 영빈관이다. 다과도 베풀고 숙박도 하는 공간으로 본채와 완전히 분리시켜 사대부가 남의 안채 사정을 알 필요 없게 해놓았다. 손님도 굳이 안주인에 미안한 마음 없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했다. 이 집에도 현판이 여러 개 있었다. 주 현판 ‘七柳軒(칠류헌)’ 외에 또다른 글씨의 칠류헌 현판이 있었다. 위쪽 현판은 쓴 사람을 알 수 없고 아래쪽은 필체가 아까 본 오세창의 ‘존양재’와 같은 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세창의 글씨다.
‘칠류’는 말 그대로 보면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다. 강 선생님은 칠(七)은 천지운세가 월화수목금토일 처럼 순환하듯이 조선왕조 국운이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했다. 또 류(柳)는 우국충신 도연명을 상징하는데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버드나무 다섯그루를 심은데서 따와 일곱그루의 버드나무로 왕조를 생각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또 중국의 주자학자 주희(朱熹ㆍ1130~1200) 가 쓴, 전국적으로 유명한 ‘魚躍海中天(어약해중천)’도 있다. ‘물고기가 바다에서 뛰어 하늘로 오른다’는 뜻인 만큼 의미심장해 보인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도 행동도 하지말라’는 옥람(玉藍) 한일동(韓溢東) 선생의 ‘사물재(四勿齋) 현판과 영친왕의 서예 스승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이 쓴 ‘白石山房(백석산방)’도 있다. ‘선비가 여유롭게 거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현판 투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돼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됐다. 이런 뜻밖에 생기는 일들이 여행의 또다른 묘미가 아닐까. 현판은 그 수려한 필체를 감상하면 예술품이 됐고, 그 뜻을 새겨보면 문학이 되었다.
덕분에 고택체험이라는 1차 목표에 이어 현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다. 이것이 오늘 내 여행의 새로운 소득이랄까.
현판은 곧 그 집을 대변했다. 선비들은 집을 소중히 했고 그 의미 또한 중시했다. 이는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자존심이자 몸과 마음을 바로 가지려는 ‘선비정신’이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나 명필가들이 선비사회에 이런 ‘재능기부’를 하며 교류했던 것이다. 광화문과 숭례문 등 주요 건물에도 다 이름이 붙는다. 누가 썼는지, 어떤 의미인지 하는 것들이 모두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한옥 공부를 마칠 즈음, 내일 뵙기로 한 이곳 춘양 이장협의회 서헌수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자가 혼자 저녁을 할 처지임을 간파한 배려였다. 정말 고마웠다. 만산고택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는게 단점인데 때마침 서 회장님으로부터 반가운 제안을 받은 것이다. 또 혼자 밥을 먹을 뻔 했는데 동무가 생겼다. 서 회장님은 아주 적극적이고 의리가 넘친 분이셨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정겹고 소탈했다.
드디어 조용한 시골 면소재지 고택에서의 하룻밤, 식사 후 돌아오니 그 사이 숙박하러 온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으로 새어나왔다. 내 방은 작았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없다. 현대식 기기라고는 형광등과 필자의 휴대폰, 카메라 뿐. 여기에 있는거라곤 이불 밖에 없다. 화장실과 샤워장은 밖에서 공용으로 쓰는 불편함을 즐겨야 하는 것도 이곳에서 하룻밤 보내는 맛이다. 가는 못에 문고리를 걸고 누우니 기분이 묘하다. 얇은 종이문이 안과 밖을 가려줄 뿐이다.
새벽 동창이 밝아올 무렵 멀리서 수탉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 깼다. 기계음에 깰 때와는 달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니 기분도 상쾌하고 정겹다. 저녁에 따뜻했던 온돌은 식어서 밋밋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온기를 준 것이다. 먼저 일어난 만큼 화장실과 세면장을 선점해 쓰고 다시 카메라를 들고 뜰을 둘러봤다. 화단의 꽃들은 아침이슬을 머금고 햇살에 반짝였다.
아직 잎이 나지않은 100년 넘은 대추나무가 마당 한 켠에 앙상하게 버티고 섰다. 파릇한 잎이 났으면 사진찍기에도 좋았을 걸.
처마에는 예쁜 화초들이 작은 화분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집 앞으로 나가면 맑은 운곡천이 흐른다. 만산고택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인데 국가문화재 심의에 올라가 있다고 한다.
한옥이 갖는 매력 중 하나가 고풍스런 품격이다. 조선 사대부 고택에서의 하룻밤, 짧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활력을 얻기엔 충분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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