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자 한 조각을 앞에 두고 쌍문동 골목 친구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삶을 살고 있는 지를 이야기한다. 그 시절엔 귀했던 피자 때문이다. 덕선(혜리)은 “우리 언니 성보라야”라고 말한다.
‘응답하라 1988’(tvN)의 성보라(류혜영)는 쌍문동 ‘미친 개’다.
네 살 터울 여동생 덕선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무시한다. 막말도 예사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이 나오면 밥상 앞에서 머리채를 잡는다. 엄마 아빠도 보라의 성질을 감당하지 못한다. 집 안에선 폭군이 따로 없다. 동네 어른들도 보라를 슬금슬금 피한다.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겠다"고 한다. 이런 언니와 함께 산다면 매일이 고달플 것도 같다.
그런 보라에게도 '인간미'라는 것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동생들을 닥달하던 보라는 의젓한 첫째가 돼 동생들을 다독인다. 시골에 놀러간 옆집 동생이 고열로 앓고 있다는 이야기에 동네 아주머니를 지방까지 데려다준다. 판검사가 꿈이었지만 부모님의 등록금 부담을 덜어주려 서울대 수학교육과에 장학금을 받아 진학했다. 부모님께는 말도 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다. 급기야 덕선의 짝사랑 상대인 선우에게서 고백도 받는다. 덕선은 울화가 치밀 법도 하다.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마음이 요동쳤건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성보라라니. “왜 하필 성보라냐”며 덕선은 선우의 머리를 후려친다. "너 다신 안 본다"고 한다.
1988년에 대학 2학년이 된 보라는 5공화국 시절 사춘기를 보냈다. 1980년 5월엔 열세 살이었고, 보라가 중학생이 됐을 땐 '성공한 쿠데타'로 5공화국이 출범했다. 5공화국의 업적은 찬란하다. 경제 성장의 증거로 서울올림픽대회 유치를 성공시켰다. 그 화려함 뒤엔 부정부패, 인권유린의 현장들이 흩날렸다. 보라는 5공화국의 끝자락에 대학생이 됐다.
덕선은 “데모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라며 언니한테 바락바락 기어오른다. 성보라의 진짜 반전은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는 가족과 이웃의 정, 따뜻한 골목길 풍경을 그리면서도, 학생운동이 끊이지 않던 시대의 아픔을 함께 소환했다. 보라는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청춘이다. 88서울올림픽의 피켓걸로 발탁, 쌍문동의 자랑이 된 동생에게 “정부의 3S(SEX, SCREEN, SPORTS) 정책에 놀아나는게 자랑이냐”고 말한다. “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철거민이 생겨났는지 아냐”고 말하는 건 이 드라마에서 보라뿐이다.
보라는 아마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보고 자랐을 거다.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면서도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신군부 독재 시절인 83년 5월 가택연금된 후엔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했다. 그는 “굶으면 죽는게 확실하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은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독재정권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87년엔 마침내 6월항쟁이 시작됐다. 보라가 대학교 1학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직선제는 열렸으나,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또 다시 신군부 출신 대통령을 맞았다. 보라는 그래서 늘 화가 나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최루탄에 범벅이 된 채 집에 돌아오니 아빠는 ‘데모나 하고 다니는’ 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엄마에게 “내가 뭘 잘못했냐”고 한다. “아빠가 뭘 아냐”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자신을 휘감은 의지와 아픔을 입밖에 내진 않는다. 집에서는 그랬다. 방문을 닫고 들어가 보라는 ‘한국민중사’를 꺼내 민정당사 점거 농성 일정을 살피며 팔의 상처를 닦는다. 그것은 피울음이었을까. 드라마엔 ‘광야에서’가 흐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6일 진행된다. 개정된 국가장법에 따라 거행되는 첫 국가장이며, 의회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등원이다. 그 시절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 많던 투사들은 지금 집권여당의 지도부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정치인의 오늘을 보니 스물한 살의 보라가 단아한 중년으로 성장한 모습도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27년이 흘러 마흔여덟이 된 보라는 여성스럽고 온화함의 상징인 배우 전미선으로 변해있다. 스물한 살의 보라는 엄마 아빠의 눈을 피해 담배를 태웠으나, 마흔여덟의 보라는 남편의 눈을 피해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뿐이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송곳' 대사) 법. 칼끝은 무뎌진다. 민주화 동지들은 민중을 압박한다. 앙칼지고 다부졌던 스물한 살 류혜영의 음성은 사근사근한 마흔여덟 전미선의 음성으로 갈아입었다. 투쟁의 의지가 서렸던 매서운 눈빛은 강아지처럼 온순해졌다.
그들이 있어 많은 것을 누린 시절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풍자의 대상이 됐던 첫 문민대통령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정부를 소재로 풍자하면 심의를 받는다. 불방되기 일쑤다. 외압 의혹이 일지만, 제작진은 부인한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은 외압이 들어올까 싶어 자기검열도 했다. 시사교양 PD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으니, 엉뚱한 이야기만 한다. 한 때 그들은 ‘시대의 입’이었다.
보라가 88년 이후, 마흔여덟이 될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의 남편을 찾는 것보다, 보라의 소개팅 상대가 ‘응사’(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정우)일지도 모른다는 추리보다 더 관심이 간다. 마흔여덟의 보라가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지켜보는 장면이 ‘응팔’에 나온다면 어떨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쿠데타”(김영삼 전 대통령)였기에, 민주화에 청춘을 헌신했던 그 시절 모든 보라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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