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회> 죽음의 계곡 15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초, 앉은뱅이 나라에선 절름발이가 왕초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홀딱 벗은 놈들 앞에서는 팬티 한 장이라도 걸친 놈이 왕초라는 말이 된다.
“이리들 앉으세요.”
비록 윗도리는 알몸이지만 팬티와 바지를 걸친 권도일이 명령하자 홀랑 벗은 아랫도리에 수건 한 장만 돌돌 말아 걸친 도종호와 송달민은 군말 없이 그 명령에 따랐다. 이를테면 지극히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사자는 갈기가 풍성해야 왕초 노릇을 하기 쉽다. 사슴도 뿔이 멋져야 일단 점수를 딴다. 쥐도 털 없는 알쥐보다는 번듯하게 털 난 놈이 왕초 노릇을 할 확률이 높은 법이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회장 2세께서 구상하고 계신 우리 회사 레이싱 팀 창단에 대해서 지금 브리핑을 해주세요. 제가 듣고 판단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야 내일 맑은 정신으로….”
“아닙니다. 지금 당장 브리핑하세요.”
권도일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종호와 송달민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긴 조금 전까지 파트너를 희롱하던 단꿈에서 미처 헤어나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니 수치를 대입하고, 전망을 도출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사업을 브리핑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전무님,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릴 수 없네요.”
“그럼 내가 묻겠습니다. 유민제련그룹에서 ‘런런런 SPC’를 창업해서 랠리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번 5개국 관통 랠리에 유민그룹에서 우리 거성 자동차를 탄다는 말은 들어보셨습니까?”
“물론 알고 있지요. 처음에 우리 거성에서 제시한 안이기도 합니다. 정부 고위층에서 랠리사업을 주도해줄 수 있냐고 의견제시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고심 끝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완책으로 10% 금액을 협찬하기로 했지요. 협찬하는 대신 경기에 출전하는 자동차를 우리 회사 제품으로 쓰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번복하고 우리 회사에서도 자체 팀을 꾸려 랠리 경기에 출전하기로 했단 말씀이지요?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10% 금액인 300억 원을 내는 것도 배가 아프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유민그룹의 랠리 팀이 별 볼일 없더라고요. 회장 아들이 직접 차를 몬다던데… 그 친구, 아주 형편없는 날라리예요. 그러니 우리 차를 몰고 경기에서 꼴찌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만 떡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직접 랠리 팀을 창단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유민그룹에 우리 차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취소하겠군요.”
“협찬을 하지 않으니 우리 차를 타라는 명분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럼 유민그룹에서는 외제차로 승부를 걸겠군요?”
“물론입니다. 돈만 처바르고 헛다리 짚는 거지요. 정부 고위층이 노리는 효과는 민족정신 함양입니다. 우리 선수가 우리 차로 경주해서 외국 팀을 깨부술 때에 명분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거성에서 그 명분을 차지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돈도 내지 않고 참가하니 실리마저 찾는 셈이지요.”
권도일로서는 모두 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찌 그 정도 방정식을 모를까? 도종호는 권도일이란 넝쿨을 당기면 그 끝에 크리스 뱅글이란 호박이 달려 나올 것이라는 사실은 끝끝내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권도일이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물어본 까닭은 오로지 헤게모니를 움켜쥐기 위해서였다.
홀딱 벗은 상태에서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사람에게 브리핑을 했다는 것부터가 치욕이었다. 이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도종호 상무는 권도일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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