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회> 바람 부는 길 22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베들레헴 종합병원 응급실도 서울에 있는 여느 응급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급요원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오는 중환자로부터 가벼운 소화불량 환자에 이르기까지 북적이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남자간호사들의 숫자가 여자 간호사들 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조금 낯선 광경일까?
“그나마 응급실엘 찾아 오니 안심이 되는군요. 머나먼 외국까지 여행 오셔서 몸 아플 때가 제일 힘들지요.”
가이드는 헌신적이었다. 성지 순례를 도급받은 여행사의 상술이겠지만 권도일로서는 불편할 따름이었다. 가이드는 권도일의 베드 옆에 보조의자를 펼쳐 놓고 아예 날밤이라도 새우려는 기세였다.
“응급실 입원수속도 마쳤으니 그만 퇴근하세요.”
“아닙니다. 아침에 정식으로 진료 받으실 때까지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잠 좀 자고 싶어서 그래요. 옆에 계시면 불편해서 잠을 잘 수 없잖아요. 그러니 어서 퇴근하십시오.”
“아닙니다. 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손님 건강이 우선입니다.”
“나는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수 없다니까요? 그러니 친절한 척 하지 말고 제발 좀 돌아가 주세요.”
인정에 묶여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일, 권도일은 의도적으로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응급실 의사들이 임무를 교대하는 새벽 6시, 이스라엘 ‘어번’사의 직원이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타나게 될 새벽 6시 이전에 그를 떨쳐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알겠습니다. 갈게요. 만약… 몸이 다 나으면 아침 8시까지 베들레헴 언덕 위에 있는 예수탄생 성당 정문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고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그러자 막상 혼자 남게 된 권도일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상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스키장 꼭대기에서 경기를 치르는 게릴라 레이싱에는 몇 나라 선수들이 참가했을까? 김지선은 전진후와 한 팀이 되어 호흡을 맞추었을까? 재벌 2세는 예견한 대로 충분한 언론플레이를 펼치고 있는 것일까? 유호성은 그 경기에 얼마만큼이나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유호성을 불구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또다시 놓쳤다는 점이 아쉬웠다.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그를 낭떠러지로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 하리.
“간단히 채혈부터 하겠습니다.”
남자간호사 한 명이 권도일의 팔에 고무줄을 감기 시작했다. 정맥으로부터 피를 뽑기 위해 혈관을 도드라지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권도일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 간호사는 피를 뽑는 대신 은빛 주사기에 돋아난 작은 바늘을 그의 정맥 속으로 꽂아 넣었다. 짧은 시간동안 수면을 유도하는 수면촉진제 프로포플이었다.
프로포플 주사를 맞은 권도일은 미처 주사바늘이 빠지기도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남자간호사는 그를 등에 업은 채 빠른 동작으로 비상구를 통해 응급실 밖으로 사라졌다.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거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의료차트를 넘기며 정식 의료진이 권도일을 찾아 왔을 땐 텅 빈 베드만 휑하니 남아있었다.
“여기 있던 동양인 환자 어디 갔어요?”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요, 화장실 갔나요?”
“겉보기에도 말짱하더니 말도 없이 귀가한 모양입니다.”
의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원래 응급실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했다. 마침 앰뷸런스 한 대가 도착하자 의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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