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회> 바람 부는 길 38
도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청은 바람난 아내의 뒤를 캐기 위한 남편의 비정한 수법으로 쓰이곤 했다. 사랑이 식은 것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바람피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남편의 최후 필살기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추적해보면 기껏해야 훅 스위치에 전화선이 패스되도록 하여 통화 내용을 엿듣는 정도였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선전화를 엿듣는 감청기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나 요즘은 도청기술도 너무 발전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기기의 종류도 많고 방식도 기발하다.
마이크로웨이브 극초단파 송신기를 사용하여 애초부터 도청기 탐지기기에 의한 탐지 걱정 없이 소리를 보내거나, 마이크로 칩을 사용한 초소형 카메라로 바늘구멍만 한 틈만 있으면 사진도 찍어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금속탐지기나 도청탐지기를 들이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너무 경솔했어요. 처음부터 보안에 만전을 기했어야 했는데….”
“이스라엘 Urban 사와 맺은 기밀사항이 누구 귀에까지 들어갔을까요?”
“청와대까지 퍼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Urban 사에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죠?”
“아직 Urban에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두르는 것입니다. 우선 비밀이 새어나간 경로부터 알아낸 후에 더는 비밀이 번져나가지 않도록 제2의 방어선을 펼쳐야지요.”
그 후로도 10여분을 더 달린 후에야 거성그룹 본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미 퇴근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여서 본사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식겁한 사람은 경비원을 비롯하여 로비의 야간 안보를 맡은 청원경찰들이었다. 좀 전에 느닷없이 총무부 요원들이 들이닥치더니, 이번엔 사전 연락도 없이 VVIP가 들이닥쳤으니 놀랄 만도 했다.
“책을 몽땅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보라고 했잖습니까? 화분의 흙도 모두 쏟아내라고요.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습니까?”
“하지만… 제가 감히 이 세간들을… 어떻게 흩어놓을 수….”
총무부장은 아무 잘못도 없이 꾸중을 들어야 했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있나. 아닌 밤중에 VVIP에게 불려와서 그 방의 세간을 들어 엎어야 하다니.
“흩어놓자는 게 아니라 이렇게 탈탈 털어보라는 겁니다.”
재벌 2세는 양복 윗도리를 벗어 던지더니 복도에 놓여 있던 화분 한 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손수 그 화분을 뒤집어 흙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번쩍번쩍 윤이 나던 복도에 흙이 쏟아지고 먼지 또한 사방으로 날렸다.
재벌 2세가 이렇게 시범을 보인 뒤로부터는 퍽퍽! 와장창! 사무실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총무부장은 바퀴 달린 수레를 동원하여 화분을 모두 밖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너가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시범을 보이는 걸 어쩌랴. 잘리기 싫으면 복종할 수밖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총무부장은 화분을 뒤집어엎으면서도 슬슬 재벌 2세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어쨌거나 평소에 마주치기만 해도 쫄던 재벌 2세의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자니 은근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몽땅 뒤집어엎어요. 다 쏟아내라고!”
“네, 네! 하, 이것 참.”
난장판이 되어가는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재벌 2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쩌면 이 짓은 도청을 감행한 정치권의 높은 양반에게 우회적으로 반항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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