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주연만이 주목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어떨 때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주목받는다. 원톱, 투톱 시대에서 다양한 인물군이 살아나는 시대다. 과거 조연들은 주연을 띄우기 위한 보조적 역할로 존재했다. ‘주몽’에서 해모수를 연기한 허준호와 금와왕의 전광렬은 주몽인 송일국을 성장시키고 돋보이는 역할을 하거나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 게 큰 임무다. ‘왕과 나’의 전광렬(조치겸 역)도 내시 김처선(오만석 분)을 띄우고 퇴장한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는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들도 전면에 나선다. ‘추적자’에서 극 중반 손현주가 사라졌을 때 박근형과 김상중의 연기는 크게 빛이 났다. ‘신사의 품격’에서는 장동건-김하늘 못지 않게 김정난과 임메아리(윤진이 분) 등 주변 인물들도 집중적 조명을 받고 있다.
과거에는 조연들의 방송 분량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연기를 잘해 존재감을 발휘하면 ‘미친 존재감’이라며 칭찬해줬다. 이제는 분량과는 상관없다. 주연을 돕는 조력자건, 악역이건 캐릭터만 좋다면 연기력과 합쳐져 실질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실상 주연(공동주연 포함)이 되기도 한다. ‘빛과 그림자’에서 전광렬(장철환 역)은 안재욱을 돋보이기 하는 ‘악역 얼굴마담’에 그치는 게 아니라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 내는 주요한 엔진이었다.
조연들도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연기 잘하는 중년 연기자들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고, 톱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멜로드라마 위주에서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변화의 흐름 속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신품’ 김정난이 연기하는 박민숙, 돈있고 개념도 있으면서 쿨하기까지 SBS ‘신사의 품격’에서 도도한 박민숙을 연기하는 김정난(41)이 그런 배우로 꼽힌다. 박민숙은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철부지 유한마담인줄 알았다. 청담동에서 빌딩을 여러 채 소유한, 돈을 주체할 수 없는 도도한 여자, 남편도 돈의 힘으로 얻은 여자, 그래서 자기 스스로 권태기에 빠져든 여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민숙은 돈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개념도 있었다. 돈과 개념이 합쳐지니 시너지 효과가 났다. 이건 우리 사회가 돈 있는 사람이 개념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를 만나기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런 멋진 캐릭터가 드물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대리만족으로 즐기고 있다. 이제 민숙이 어떻게 또 한 방을 날려줄지 기대감이 생긴다.
부자가 개념을 갖추면 자칫 계몽적이 되기 쉽다. 그러면 거리감이 생긴다. 고맙고 황송하기는 하지만 매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민숙은 개념을 ‘쿨’하게 발휘한다. 민숙은 윤리교사 서지수(김하늘)가 사고뭉치 제자 김동협(김우빈)의 뺨을 수차례 때린 한 학부모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당하자 그 학부모로부터 사과를 받게 해 줬다. 그리고는 동협에게 “방금 잘 봤니? 이게 앞으로 니가 나올 세상이고, 돈 없는 사람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야”라고 말한다. 얼마나 쿨한 가르침인가. 이런 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다.
윤리 교사가 그렇게 수없이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던 동협에게 순간 쏙 들어온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교육적이고 계몽적이지 않고 쿨한 코칭의 방식을 구사하는 부자는 멋있고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부자가 인간적이기는 매우 어렵다.
민숙은 화려한 삶을 사는 듯한 홍세라(윤세아)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선뜻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세라가 후배 프로골퍼와 골프연습장에서 싸울 때도 해결사로 나섰던 건 박민숙이었다.
민숙은 돈과 개념, 카리스마를 갖췄지만 가지지 못한 건 사랑이다. 그래서 근원적인 외로움에 시달린다. 못말리는 바람둥이 남편 이정록(이종혁)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도 진심은 있다. 그것을 민숙이 발견하게 한다. 박민숙의 인간적인 매력이 찌질한 남자에서 점점 사랑의 맛을 아는 ‘신사’로 성장하게 한다. ‘신사의 품격’에서 가장 큰 재미를 주는 커플도 정록-민숙이다. 수시로 별거도 하지만 민숙과 정록이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는 신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주변을 볼 줄 알고, 개념도 챙기며 ‘쿨’한 태도는 유지하는 돈 있는 여자 박민숙은 멋진 캐릭터다. 그것을 김정난은 당당한 목소리로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잘 연기하고 있다.
▶‘유령’, 곽도원이 맡은 권혁주, 집요하지만 귀엽다 SBS ‘유령’의 사이버수사팀 권혁주 팀장을 연기하는 곽도원(38)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냉철한 검사 조범석으로 실제 검사보다도 더 검사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배우다. ‘유령’에서는 사이버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예리한 촉과 특유의 승부근성으로 한 번 잡은 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까지 갖춘 형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소’라고 부른다.
곽도원은 초반 소지섭(김우현 얼굴을 한 박기영 역), 이연희(유강미 역) 수사팀의 직속상관이자 조력자 정도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연희의 대사가 드라마에 몰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색하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소지섭-이연희 팀 대신 소지섭-곽도원 팀을 전면에 내세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권혁주를 연기하는 곽도원은 시청자에게 낯익은 배우는 아니지만 충분한 ‘포스’를 유지하고 있다. 수사할 때는 다혈질적이고 막무가내인 팀장이지만 그 속에는 냉철하고 인간적이고 귀여운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 소녀시대의 유닛 ‘태티서’의 트윙클을 좋아하는 ‘귀요미’ 아저씨다.
권혁주 팀장이 시청자와 가까워진 것은 오랜 연극무대에서 다져진 연기 덕분이기는 하다. 대본 파악 능력이나 연기에의 몰입도 모두 뛰어나다.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유령’은 보통 시청자들이 마음 놓고 보기에는 다소 어렵고 치밀한 IT범죄 수사물이다. 박기영 얼굴을 한 소지섭은 해커 출신이다. 소지섭과 이연희, 사이버 수사팀 요원들 간의 대화는 잘 와닿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의 어려운 용어를 계속 말해 가며 솔루션이 있다고 하지만 빨리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권혁주 팀장이 “디도스 공격이고 나발이고~”라며 말하며 보여주는 연기는 시청자에게 훨씬 더 쉽게 다가간다. 이 드라마가 어려워 집중이 잘 안되면 곽도원의 시선을 따라가면 된다.
게다가 권혁주는 권력을 의식하는 윗선 간부들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조직의 정치에서는 밀리는, 소위 ‘서민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친근감이 들게 한다. 정의를 위한다며 뛰는 형사보다는 권혁주 같은 인간냄새 나는 형사 아저씨가 시청자에게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골든타임’ 이성민이 연기하는 최인혁, 이렇게 용감한 의사도 있다 MBC 월화극 ‘골든타임’에서 최인혁이라는 중증외상외과의사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 내 규정을 어기고 오로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일념이다. 위중한 환자를 앞에 두고 필요한 행정 절차를 다 밟다가는 언제 환자를 살리느냐는 것이다. 최인혁은 급한 환자를 보면서, 응급실 수술은 당직의사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지킬 리 없다. 그러다 최인혁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 최인혁은 병원에 사표를 내고도, 후배의사들이 응급실에 실려온 여자환자를 제대로 보지 않고 퇴원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호통을 쳤다.
최인혁이 얼마나 중요한 캐릭터인지는 ‘골든타임’을 조금만 봐도 알 수 있다. ‘골든타임’이 불리한 건 의학드라마들이 그동안 많이 방송됐기 때문에 차별성을 부각시키기가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주인공인 이선균(이민우) 같은 찌질한 의사는 기존 의학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였지만 이를 부각시켜 공감하게 하는 게 숙제다. 이 역할을 맡은 인물이 최인혁이다.
이선균은 실력이 없어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찌질한’ 의사다. 의대를 졸업한 후 한방병원에서 CT오더나 내주며 편안하게 지냈다. 경험이 일천한 인턴인 이선균은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배 대신 대체근무하다 응급환자를 제대로 조치하지 못해 사망에 이르게 했고, 응급실 야간 당직을 서다 쇼크로 헤매는 환자 앞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이선균은 실력이 없어 치료를 못하지만 병원 내 다른 선배의사들은 제도와 현실에 막혀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다. 최인혁이 병원을 나간 사이 위급한 교통사고 환자가 들어왔지만 환자실도 없고 수술할 의사도 없어 환자를 돌려 보내야 했다.
‘골든타임’은 최인혁이 이선균을 각성하게 한다. 이선균은 자기 고집을 가지고 환자를 위해 몸을 던지는 최인혁을 보며 많은 걸 깨닫게 된다. 지금은 능력이 안돼 수술칼을 잡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주관과 개념은 있는 의사다. ‘골든타임’은 이선균이 실력과 용기를 동시에 갖게하는 성장드라마다.
최인혁을 맡은 이성민(44)은 이선균을 각성시키는 멘토나 스승 역할이다. 이성민이 이선균에게 “이 환자는 죽어도 되는 환자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다. 이성민은 멘토 역할 외에도 자신이 전면에 나서 극을 이끌기도 한다. 의학 드라마지만 권력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모습 한가운데에 최인혁이라는 의사가 있다. 이성민은 지금까지 조연만 맡았지만 이번에는 이선균과 함께 사실상 주연이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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