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일이 터졌다.
임금을 면전에서 닦아세우던 사대부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사대에 어긋나고 글자가 저속한데다 글자 좀 안다고 억울한 일을 안 당하겠느냐”며 반대했지만 실상은 백성들이 글자를 알고 의식이 깨어나면 다스리기 함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대로였다.
누군가 경복궁 근정전 벽에 ‘하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썼다. 왕이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느냐”고 했던 그 글자였다. ‘조선왕조실록’은 ‘하연을 영의정 부사로 삼았다. 하연은 까다로운 터에 노쇠해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 위에 쓰기를’이라고 적었다. 1449년(세종 31년) 10월 5일의 일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3년여, 언문은 세종이 뜻한 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을 시원하게 표현하는 수준이 됐다.
저잣거리의 언문 활용은 왕궁 내에서 보다 더 활발했다. 1485년(성종 16년) 7월 17일, 언문 투서가 나돌았다.
‘시장을 옮기라’는 나라의 지시가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이었다. 투서는 ‘판사가 제 자식을 위해, 참판이 뇌물을 받기 위해 시장을 이전하려는 것’이라며 영의정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올렸다. ‘성종실록’은 ‘가두시위와 함께한 이 익명의 투서사건으로 의금부에 붙잡힌 사람만 79명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투서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글을 익힌 백성들은 더 이상 만만한 무지렁이가 아니었다. 언문 사용은 더욱 늘어났다.
백성들은 왕에 대한 비판서도 돌렸다. 연산군을 비판하는 언문 투서(제목 ‘무명장’)는 신랄했다. 투서는 개금·덕금·고온지, 3명의 의녀가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빌어 임금을 욕하는 글이었다. ‘우리 임금은 왜 신하를 파리머리 끊듯 죽이는가’ ‘여색에 분별이 없어 의녀·현수(여자 무당)까지 궁중에 들이고 있으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크게 화가 난 연산군은 모든 사람을 불러들여 필적감정을 하는 한편 거액의 현상금과 고위관직을 내걸며 대대적인 투서자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언문 금지령을 내렸다. 그 바람에 훈민정음은 반포 55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나 이미 ‘국민의 글자’이자 ‘소통의 글자’이며 ‘생활의 글자’가 된 뒤였다.
훗날 선조는 언문으로 교서를 내렸고 백성들은 모내기 법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서를 냈다. 물건이나 돈을 주고 받을 때도 이용했고 의학상식을 나눴다. 여성들은 언문 서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아 자식들을 가르쳤다. 사대부들도 여자들과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언문을 이용했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써 시대의 부패상이나 잘못된 제도를 고발하기도 했다.
덕분에 언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 세계적인 한글이 되면서 글로벌 디지털 언어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못난 지식인들’은 한글에 대해 “2류국가도 되기 힘들다” “청소년들의 저능화가 문제다” “컴퓨터 시대에 맞지 않다” “국가 생산력이 감퇴한다” 등의 소리를 늘어놨다.
이 역시 한치 앞을 못 본 ‘문자권력’의 아집이었다. 지내놓고 보면 틀림과 옳음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늘 다음을 생각한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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