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는 야구에만 있는 묘한 공격전략이다. 공을 살짝 건드리거나 방망이를 톡 갖다 대 주자를 진루시키는 게 목표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린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 ‘희생번트(Sacrifice Bunt)’다. 하지만 성공률이 아주 높지는 않다. 번트를 잘못 해서 앞선 주자를 아웃시키기도 하고 다음 타자가 득점타를 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래서 공격형 감독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괜히 아웃 카운트 한 개를 상대에게 그저 바치는 꼴이고 호쾌한 맛이 없는데다 통계적으로 봐도 별로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심장 감독조차 단기전 토너먼트 경기에서 번트 공격을 하는 이유는 더블 아웃 등 돌발적인 상황을 피할 확률이 2~3배 높아서다.

최근 LG 대 한화의 한국시리즈 5차전 3회말 무사 1·2루. 1점차로 뒤진 한화의 다음 타자는 포스트시즌 16타점의 문현빈.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으므로 강공도 펼칠만 했으나 선택은 번트. 타자는 아웃되더라도 성공하면 1사 2·3루여서 한방에 역전도 가능했지만 번트 실패 후 공격에서 병살타를 치고 말았다.

6회초 LG 무사 1루. ‘정석’대로 번트 공격이 이어졌다. 희생번트로 2루에 가 있던 주자를 다음 타자 김현수가 안타로 불러들이며, LG는 2점 차로 앞서 나갔다. 시리즈는 LG의 우승으로 끝났다.

대한민국 번트의 전설은 1982년 일본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8회말 1사 3루에서 나온 김재박의 ‘캥거루 번트’. 일본 투수가 번트를 예상하고 공을 밖으로 뺏으나 김재박이 펄쩍 뛰어오르면서 방망이를 갖다 댔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김재박도 스퀴즈 번트 사인이 난 줄 알고 죽기살기로 번트를 댄 것이었지만 모두 사인을 잘못 읽어서 발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번트는 3루 쪽으로 굴러가는 내야안타가 됐다. 그도 살고 3루 주자도 홈에 들어와 동점이 되며, 대한민국 역전 우승의 발판이 됐다.

번트는 시원한 맛이 없어 현대 야구에서는 그다지 애용하지 않는다. 분명 정확성과 타이밍을 요구하는 기술이고 치밀한 전략의 하나지만 소심하게 방망이를 살짝 들이미는 행동이 조금은 비겁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짜 투수의 첫 등판 때나 초반 또는 후반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팀에서는 쓰지 않는다.

하지만 번트에는 아름다운 정신이 있다. 그 안에는 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가 들어있다. 그렇기에 타자가 번트로 주자의 진루를 성공시키면 일반적인 땅볼 아웃과 달리 희생번트로 기록하고 타수·타율·출루율 계산 시 뺀다. 같은 번트라도 기습번트나 페이크 번트 슬래시(번트를 대는 척하다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와는 다르다.

재미없는 번트의 미학은 희생이다. 지금 우리도 그런 잔잔한 희생의 미학의 바탕 위에서 선진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남동생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기꺼이 공장에 들어간 누이, 자식을 위해 밤샘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허리가 꺾여가며 날품을 팔았던 어머니, 타국만리 고된 삶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형님, 나라가 어려우면 제 살도 깎을 줄 알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앞길을 헤쳐 나간 덕분이다.

희생은 고귀하다. 그러나 힘들고 손해다. 하지만 더러 희생은 함께 사는 길이기도 하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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