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모어’ 2편

역대 최대, 최고 규모…최초 연속

충무로 대한극장 뒤엎은 집요한 마법

대한극장 건물을 손봐 매키탄 호텔로 뒤바꾼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대한극장 건물을 손봐 매키탄 호텔로 뒤바꾼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03년 런던 초연, 2011년 뉴욕 진출 누적 관객 200만 명, 2016년 상하이 진출 누적 관객 65만 명.

지난 23년간 세계 주요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슬립 노모어’가 선택한 서울은 명실상부 역대 최대,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제작비만 해도 무려 250억원. 막대한 자본은 대한민국 영화 산업의 심장인 충무로 대한극장을 1930년대 스코틀랜드로 되살렸다.

이머시브 공연인 ‘슬립 노모어(Sleep No More)’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다. 관객은 가만히 앉아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규모의 7층 짜리 공간을 걷고 뛰며 공연을 만난다.

창작진은 이미 제작 2년 6개월 전부터 대한극장 건물을 서울 공연의 공간으로 낙점했으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바렛 연출가는 “각종 인허가 절차가 필요했다”며 “에스컬레이터 같은 금속 구조물을 들어내고 거대한 공간을 메우는 구조적 작업이 끝난 뒤에야 ‘무대적’ 변환을 시작할 수 있었다”며 지난 과정을 돌아봤다.

전 세계 공연에서 영화관이 ‘슬립 노모어’의 공간으로 변신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런던과 보스턴은 학교 건물, 뉴욕은 나이트 클럽이었다. 상하이는 “껍데기만 남은 빈 건물”이라고 바렛 연출가는 귀띔했다.

바렛 연출가는 “연극 용어로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혹은 ‘장소 친화적(Site-sympathetic)’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장소 친화적’ 공연으로 공간의 역사, 서사를 쓰기보단 분위기나 건축적 요소에 영감을 받았다”며 “반면 서울은 영화관을 호텔로 바꾸는 작업이라 영화적 특질이 자연스럽게 배어났다. 처음으로 ‘진짜’에 가까운 ‘장소 특정적’ 접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대한극장의 상영관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기존 경사를 유지하며 100여개에 달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렛 연출가는 “오래된 영화관이라 높은 층고를 얻을 수 있었고, 그간 우리가 꿈꾸던 가장 영화적인 버전을 만들 수 있었다”며 “처음으로 같은 층에 호텔 로비, 연회장, 주방을 전부 구현했고, 위층의 객실까지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있었다”고 했다.

총 7층 규모에 100여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매키탄 호텔 내부 [미쓰 잭슨 제공]
총 7층 규모에 100여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매키탄 호텔 내부 [미쓰 잭슨 제공]

‘장소 특정적’ 공연은 ‘오직 그 장소’에서 열리기에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을 뜻한다. 즉, 장소를 옮기면 작품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춰 보면, ‘슬립 노모어 서울’은 장소 특정적 공연이라 보기엔 어렵다. ‘매키탄 호텔’에 발을 디디면 이곳이 과거 대한극장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무로의 지역적 맥락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이 공연은 ‘대한극장’이라는 상징성을 업고 공연을 끌어당기는 전략은 유효했다.

공연장의 구조는 한눈에 잡히진 않는다. 맨덜리 바에 앉아 ‘웰컴 드링크’로 목을 축인 뒤엔 호텔리어에게 이끌려 10여명이 그룹이 돼 계단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마다의 층으로 안내된다. 모두가 같은 층에서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갈 수도 있다. 애초 시작점이 1층이 아닌 셈이다. 그러니 길치, 방향치 관객이라면 꽤나 헷갈릴 수 있다.

바렛 연출가는 “이 공간을 통해 관객이 진짜 살아 있는 공간 안에 들어온 듯한 자연주의가 생겼다”며 “이런 장대한 규모로 무대를 만드는 건 놀라운 기회다. 영화 스튜디오 말고는 이런 ‘스코프’를 가진 공간을 찾기 드물다”며 감탄했다.

자본이 설계한 최대, 최고 규모다. 총 7층 규모에 100여개의 공간. 말 그대로 위압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바렛 연출가는 “방의 숫자를 정확히 세진 않았지만, 만보계를 보면 한국 관객이 가장 많이 걷게 될 것”이라며 웃었다. 관객들은 평균 1만 보 이상을 걷고 있다.

일종의 ‘전이의 공간’ 격인 맨덜리 바에서 관객들은 ‘오페라의 유령’을 연상케하는 ‘바우타 마스크’를 쓰고 특정 층으로 안내받는다. 7층짜리 공간의 설계는 리비 본과 비아트리스 민스(Beatrice Minns)가 맡아 1930년대 스코틀랜드의 정취와 히치콕적 미스터리를 정교하게 구현했다.

총 7층 규모에 100여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매키탄 호텔 내부 [미쓰 잭슨 제공]
총 7층 규모에 100여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매키탄 호텔 내부 [미쓰 잭슨 제공]

각 층마다 특징이 있다. 연회장, 종교적 공간인 크립트(Crypt), 던컨왕의 침실과 기도실이 위치한 메자닌( (Mezzanine)이 존재하는 1층은 권력과 제의의 공간이다. 2층은 호텔 로비와 리셉션, ‘다이닝 룸’이 있다. 다이닝 룸에선 캐릭터들이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거나 식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3층은 비극의 공간이다. 맥베스 가문과 맥더프 가문의 거주지. “가장 내밀한 감정이 분출되는 공간”이라고 바렛 연출가는 귀띔했다. 맥베스의 침실, 맥더프의 아파트, 공동묘지가 존재한다.

4층은 1930년대 스코틀랜드 마을의 상점가를 완벽하게 재현한 가로 그린(Gallow Green)거리다. 이 거리는 체험형에 가깝다. 사탕 가게는 반드시 들리는 것이 좋다. 스피크이지 바는 당구대가 놓인 곳이으로, 뱅코우가 살해당하기 전 맥베스와 대립하는 긴장감이 넘치는 장소다. 서로 밀고 당기는 우아한 대립 신은 압권이다. 5층은 매키탄 호텔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광기와 고통을 형상화하는 정신병원과 자작나무 숲, 은밀한 오두막이 있다. 맥신 도일 안무가는 “일대일 공간은 비밀스러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6, 7층은 서울 버전에서 추가, 확장된 공간이다. 극의 파편화된 정보를 보충한다.

각각의 층에 자리한 수많은 방의 사실감은 상당히 놀랍다. 1930년대 스코틀랜드의 장군 가문의 집을 그대로 옮겨둔 것은 물론 소품 하나하나에 인물의 심리와 역사를 투영했다. 도일 안무가는 “방 자체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등장인물들의 서사적 디테일을 담으면서도 독립된 설치작품처럼 만들었다”며 “소품은 한국 내에서 조달하거나 자체 제작을 병행했다. 해외에서 가져온 것도 많다”고 했다.

방에 들어서면 생활감이 느껴지는 책, 편지, 펜이 놓여 있다. 관객은 먼지 쌓인 책장을 넘겨보며 읽을 수도 있다. 쿠션감이 없어 다소 경직돼 보이는 침대와 의자, 그 사이로 스민 맥베스, 맥더프 가문의 오랜 역사가 섬세한 소품을 통해 살아난다. 공간마다 다른 향기를 풍기게 한 것도 관객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요소다. 자작나무 숲의 흙냄새, 정신병동의 소독약 냄새, 방마다 풍겨오는 고유의 향기는 공간의 기억을 각인하는 장치다.

‘상징적 미장센’도 많다. 맥더프 부인 방의 아이 요람에 매달린 잘린 인형들은 유산과 상실감을 상징하고, 맥베스 방에서 물이 가득 찬 욕조는 결코 씻을 수도 없는 죄책감을 보여준다. 4층 상점가도 허투루 봐선 안 된다. 상점가의 박제된 동물들도 의미심장하다. 생명력을 잃고 오로지 야망으로만 박제된 인물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슬립 노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중심으로 히치콕 감독의 누아르 영화 ‘레베카’, 1697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역사가 3대 서사축을 이룬다. [미쓰 잭슨 제공]
‘슬립 노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중심으로 히치콕 감독의 누아르 영화 ‘레베카’, 1697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역사가 3대 서사축을 이룬다. [미쓰 잭슨 제공]

워낙 많은 소품이 정교하게 배치된 데다 관객이 통제 없이 ‘탐험’하는 극이기에, 나라마다 소품 수난사도 빚어졌다. 뉴욕 공연에선 관객이 물건을 흩트려 놓은 경우도 있다. 바렛 연출가는 “종종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있지만, 그것 역시 관객들이 디테일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빚은 ‘열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도일 안무가 역시 “우리는 관객의 호기심을 원한다. 서랍을 열고 물건을 집어 보도록 기꺼이 초대하고 있다”며 “가끔 방해되는 관객도 있지만, 상호 존중과 대화가 자리 잡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책의 경우 슬쩍 가져가는 것은 ‘절도’라며 웃었다. 편지와 같은 종이류 소품은 바람에 날아가거나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 ‘여분’을 준비하고 있다. 바렛 연출가는 “어느 정도의 마모와 손상은 공연의 일부”라고 했다. 도일 안무가는 “어떤 지역에선 공연 중 캐릭터 드레스를 가져간 연세가 좀 있는 관객도 있었다”며 “그분은 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점을 깨닫고 옷을 돌려줘 정말 감사했다”고 돌아봤다.

워낙 많은 사람의 손을 타기에 유지 보수는 필수. 도일 안무가는 “매일 공연장을 청소하고 다시 세팅하고,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는 체계적인 팀이 있다”며 “매일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인력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