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초빙교수
유권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전북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초빙교수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의 12~13일 방한을 계기로 한·폴란드 관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안보지형과 산업질서가 재편되는 와중에 양국이 전략적 협력의 폭과 깊이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다.

폴란드가 한국에 기대하는 분야는 분명하다. 방산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군비를 확충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 과정에서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천무 등 한국산 무기체계를 핵심 전력 증강 수단으로 선택했다. 2022년 체결된 442억달러 규모의 방산 패키지 계약은 추가 집행과 현지 생산 확대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양국 협력이 선언을 넘어 실행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계약 규모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다. 폴란드가 필요로 한 것은 단지 무기 그 자체가 아니다. 안보 불안에 신속 대응할 수 있는 공급 역량, 일정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실행력, 그리고 장기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이었다. 한국은 그 요구에 가장 현실적으로 응답한 파트너 가운데 하나였다. 방산은 그래서 단순 수출 품목이 아니라 국가 간 신뢰를 제도화하는 통로가 됐다.

신뢰는 제조업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폴란드는 한국 배터리 산업의 유럽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LG에너지솔루션, SK넥실리스 등이 폴란드를 통해 유럽 공급망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여기에 자동차 부품, 배터리 소재, 물류, 장비 관련 기업들까지 대거 진출했다. 한국은 현재 폴란드 내 비유럽연합 국가 중 1위 투자국으로서 단순한 현지 판매 시장이 아니라 한국 기업의 유럽 생산 전략을 떠받치는 핵심 거점이 됐다. 이제 한국은 폴란드에서 제품을 파는 나라가 아니라 함께 공급망을 설계하는 투자 파트너가 되고 있다.

숫자도 이를 말해준다. 한국의 대폴란드 수출은 2015년 28억달러에서 2025년 90억달러로 크게 늘었다. 폴란드는 더 이상 ‘동유럽의 공장’이라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안보와 산업, 에너지와 재건 수요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부전선의 안보 파트너이자, 유럽 산업망과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으로 연결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한국에 갖는 의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물론 기대가 크다고 현실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원전 협력만 해도 한국이 공들여왔지만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밀려 제1원전 수주는 포기했다. 퐁트누프 지역 민관 협력 원전 수주를 둘러싼 환경과 경쟁은 여전히 유동적이다. 다만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안보위기는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방산이 열어젖힌 한·폴란드 협력의 문이 에너지, 인프라, 첨단 제조업으로 넓어질 가능성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폴란드는 한국에 안보 협력을 넘어 유럽 전략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한국 역시 폴란드에 단기 공급자가 아니라, 불확실한 시대를 함께 건너갈 장기 파트너임을 보여줄 기회를 맞고 있다. 이번 투스크 총리와 이재명 대통령의 회담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moon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