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조선협력이 정상 간 선언과 양해각서 단계를 넘어 실행 단계로 들어섰다. 워싱턴DC에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가 출범했고, 1500억 달러 규모의 마스가(MASGA) 구상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협력 의지가 아니라 이를 실제 선박 생산, 조선소 현대화, 인력 양성, 공급망 구축이라는 성과로 바꾸는 일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한미 조선협력을 회의나 양해각서의 숫자가 아니라 투자된 자본, 현대화된 시설, 훈련된 근로자, 구축된 공급망, 그리고 미국에서 실제 생산된 선박의 숫자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규제 장벽의 해소도 지원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요구한 것은 말이 아니라 선박 숫자다. 한국에는 압박이지만 동시에 기회다.
그리고 그동안 가장 불확실했던 미 의회에서도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근 미 하원 세출위원회 국방소위원회 관계자들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삼성중공업을 찾아 한국의 함정 건조 역량을 직접 살펴봤다. 이지스구축함과 호위함, 잠수함을 둘러보고 급유함을 포함한 선박 건조 능력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미 국방예산을 다루는 의회 실무자들이 직접 한국 조선소를 찾았다는 점은 행정부의 관심에 이어 의회도 한국 조선업의 실제 능력을 확인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법안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연방법전 제10편 제8679조(10 U.S.C. § 8679)는 미군용 선박과 선체·상부구조의 주요 구성품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대통령이 국가안보상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의회 통보와 30일 대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하원 세출위원회를 통과한 2027회계연도 국방예산안은 해외건조 예산 제한의 대상을 종전 광범위한 해군 선박에서 전투전력에 포함되는 ‘covered ship’으로 좁히는 방향을 제시했다. 모든 해외건조를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비전투 지원선박 등에 동맹국 조선소를 활용할 수 있는 예산상의 공간이 넓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상원 군사위원회의 2027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안도 벌크 연료선과 전략수송선을 외국 조선소에서 제한적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하면서, 참여 기업이 미국 해양산업 기반에 투자해 후속 생산과 공급망을 미국으로 가져오도록 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상원에서는 동맹국 조선소를 활용할 제한적 조달의 문을 열고, 하원 세출위에서는 비전투 영역의 해외건조를 가로막던 예산상 문턱을 낮추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아직 최종 입법도 아니고 미국 연방법전 제10편 제8679조의 기본 원칙도 남아 있다. 그러나 거의 닫혀 있던 문에 제도적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바로 지금이 한국에 중요하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한국 조선업의 명성이 아니라 미국 조선산업의 생산능력 회복이다. 따라서 우리의 논리도 “한국에서 미국 군함을 대신 지어주겠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다시 더 많은 함정을 건조할 수 있도록 한국이 조선소와 인력, 공급망과 생산기술의 복원을 돕겠다”는 논리여야 한다. 그래야 미 의회도 동맹국 조선역량 활용을 자국 일자리와 산업기반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되살리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국 내 조선소의 역할도 이 관점에서 설계해야 한다.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다. 다만 필리조선소를 비롯한 미국 생산기반이 충분한 역량을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공백을 한국 조선소가 한시적으로 메우는 가교 모델을 협의할 필요가 있다. 벌크 연료선과 전략수송선 등 비전투 선박에서 제한적인 시범사업을 시작해 납기와 품질, 비용과 보안, 공급망 관리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전투함 해외건조의 전면 허용을 요구하기보다 이러한 시범사업을 위한 법적·예산상 예외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다.
한국 내 건조가 시간을 버는 역할이라면 미국 현지 투자는 그 시간을 생산능력으로 바꾸는 작업이어야 한다. 한화가 인수한 필리조선소는 그 핵심 플랫폼 가운데 하나다. 한국의 설계와 블록·모듈 건조, 공정·납기·품질관리, 자동화와 인력양성 능력을 미국 현장에 이전해 미국 스스로 함정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조선소로 바꾸는 것이다.
한화의 필리조선소 투자뿐 아니라 HD현대의 미국 조선·기술업체와의 협력, 삼성중공업의 무인수상정과 인력훈련 협력도 같은 그림 속에서 봐야 한다. KUSPC 역시 단순한 연락 창구가 아니라 이런 역량 이전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공동 연구개발은 생산성 혁신으로, 인력양성은 숙련 근로자 확보로, 공급망 협력은 미국 내 기자재 생태계의 복원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미 함정 협력에도 순서가 필요하다. 첫 단계는 상·하원에서 나타나는 제한적 해외조달과 예산 규제 완화 움직임을 실제 제도로 연결해 비전투 보조함과 전략수송선에서 동맹국 조선 활용의 선례를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기간 동안 필리조선소를 비롯한 미국 현지 야드의 유지·보수·정비(MRO), 모듈 생산과 보조함 건조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한미 공동설계와 모듈·블록 공급, 미국 내 최종조립을 결합한 공동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충분한 실적과 신뢰가 쌓인 이후에야 전투지원함과 수상전투함 등으로 공동건조 범위를 확대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전투함으로 가는 길은 전투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보조함에서 실적을 만들고 미국 내 생산능력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
이번 하원 세출위 국방소위 관계자들의 방문도 그런 의미에서 봐야 한다. 이들이 한국의 이지스구축함과 호위함, 잠수함을 직접 살펴봤다고 해서 미 의회가 한국의 전투함 건조를 승인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행정부의 정보요청(RFI),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러트닉 장관의 조선협력 의지, 상·하원의 법안 변화에 이어 의회 실무진의 현장 확인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이다. 정치적 신호와 실무적 검토, 입법 움직임이 같은 방향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협력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협의를 진전시키는 전략적 신뢰 기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 군함 건조 협력의 대가로 원잠 기술을 요구하는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핵추진잠수함은 별도의 핵비확산·기술이전·동맹 전략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다만 한국이 미 조선산업과 해군력 재건의 신뢰할 수 있는 핵심 파트너가 된다면, 미국이 인도·태평양에서 한국의 수중전 능력 강화를 바라보는 전략적 환경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은 이제 말이 아니라 선박 숫자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미 의회에서도 그 숫자를 만들기 위해 동맹국의 조선역량을 활용할 제도적 공간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그 문을 억지로 밀어젖히는 것이 아니다. 보조함에서 실적을 만들고 미국 내 조선소와 인력, 공급망을 키워 미 의회가 다음 문을 열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국내 조선소는 한시적 가교가 되고, 필리조선소를 비롯한 미국 현지 야드는 장기 생산기반이 되며, 보조함은 전투함으로 가는 제도적 중간다리가 되어야 한다. 지금 열린 것은 아직 작은 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설계한다면 그 문은 한미 조선협력을 넘어 두 나라의 해양안보 동맹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기식 전 병무청장·전 해군작전사령관
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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