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성과와 달리 문란한 사생활 눈길

여자 바뀔 때마다 ‘걸작’…女캐릭터도 변화

민나와 결혼…여성을 성녀·요부 이분법

코지마 함께할 땐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1. 순결과 고결함을 강조하는 새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는 엘리자베트. 바르트부르크의 성스러운 세계에서 그녀는 사랑을 믿고, 죄를 씻고, 자신의 목숨으로 남자를 구원한다. 또 다른 여자가 있다. 저편 멀리 떨어진 베누스베르크. 그곳은 ‘관능적인 팜므파탈’ 베누스의 세계다. 육체와 욕망, 쾌락으로 뒤엉킨 곳, 남자의 모든 욕망과 갈망을 충족시키며 그를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여자. 남자는 두 여자에게 양다리를 걸치도 있다. 이 둘을 오가며 갈등하고 번뇌한다. (‘탄호이저’ 중)

#2. 불타는 장작더미 위로 말에 탄 채 뛰어드는 브륀힐데. 그는 남성의 구원을 위해 제단에 바쳐지는 수동적 희생양일까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일까. 브륀힐데는 아버지(보탄)의 수동적 도구였던 발퀴레의 신성을 스스로 내던지고, 남성 신들의 오만과 탐욕, 권력욕으로 얼룩진 계약의 세계를 자기 손으로 태워버린다. 가장 드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브륀힐데의 목소리는 신들의 궁전 발할라를 무너뜨리고, ‘탐욕의 상징’이었던 반지를 원초적 자연인 라인강으로 돌려보낸다. (‘니벨룽의 반지’ 중)

올여름 국내 오페라 팬들을 설레게 한 바그너는 사실 ‘문제적 인간’이다. 음악 애호가와 지휘자, 연출자들은 바그너의 오페라의 음악과 다양성을 사랑하면서도 ‘인간’ 바그너에 대해선 눈을 질끈 감는다. 그의 복잡한 사생활 때문이다.

‘탄호이저’와 ‘니벨룽의 반지’에 이르기까지 바그너의 여성관은 극적으로 변한다. 19세기가 여성에게 강요한 ‘성녀와 요부’의 지독한 이분법을 일관되게 그려왔던 그는 인생 걸작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대단원인 ‘신들의 황혼’에선 이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한 예술가의 세계에서 이토록 극적인 여성상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그의 작품엔 천재적이면서도 모순적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욕망과 배신, 잔혹한 연애사가 얽혀 있다. 현실을 함께 보낸 ‘아내들’과 후원자의 ‘부인들’을 정서적·재정적 도구로 편취했던 이기적인 남성 작곡가가 이룬 음악적 대혁명사다.

홍콩필하모닉과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녹음한 ‘바그너 전문가’인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은 “바그너는 사람을 끌어당겨 음악의 일부가 되도록 경험하게 하는 작곡가”라며 “바그너의 음악은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23세의 청년 바그너와 연상의 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의 결혼 생활을 챗GPT로 만든 그림
23세의 청년 바그너와 연상의 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의 결혼 생활을 챗GPT로 만든 그림

‘문제적 인간’ 바그너의 잔혹한 여성 편력

바그너만큼 ‘예술적 천재성’과 ‘인격적 파탄’ 사이의 간극이 큰 인물도 흔치 않다. 무대 위에선 남성과 세계의 구원을 목 놓아 노래하지만, 무대 아래에선 ‘극단적 이기주의자’였다. 낭비벽은 하늘을 찔렀고, 타인의 삶을 파괴해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을 삼았다. 그가 거친 여성들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23세의 청년 바그너. 1836년 3살 연상의 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웨딩마치를 울린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불화와 비극의 연속이었다. 파리 시절, 극심한 경제적 궁핍으로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민나는 바그너의 곁에서 집안일을 도맡으며 그의 예술적 광기를 견뎠다. 그 시기 바그너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등이다.

바그너와 민나는 서로 다른 곳을 봤다. 바그너가 하늘을 꿈꿨다면, 민나는 땅을 딛고 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민나의 고통스러운 헌신은 바그너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바그너는 명문가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드레스덴 혁명 실패 후 바그너가 지명수배자가 돼 스위스 취리히로 야반도주할 때도 민나는 함께였다.

망명자 신분의 바그너를 스위스 취리히에서 구원해 준 인물은 부유한 섬유 상인 오토 베젠동크(Otto Wesendonck)였다. 베젠동크는 바그너에게 저택 옆의 아늑한 안채를 내주고 막대한 자금을 후원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후원자의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와 내연의 관계를 맺으면서다.

밀회는 짜릿했다. 마틸데와의 ‘금지된 사랑’에 눈이 먼 바그너는 안채에서 마틸데와 비밀 편지를 주고받다 아내 민나에게 발각된다. 이는 ‘스위스 소동극’이라는 수치스러운 사생활로 남아있다. 바그너에게 마틸데는 다른 이들의 가정을 파괴해서라도 얻어야 했던 ‘영감의 도구’였다. 이 관계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바그너 인생의 가장 ‘치명적인 불륜’은 바로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의 아내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Cosima von Bülow)와의 만남이다. 바그너의 여성 편력 중 가장 격렬한 도덕적 지탄을 받은 관계다.

뷜로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초연을 목숨 바쳐 성공시킨 바그너의 충직한 제자이자 동지였다. 바그너는 뷜로와의 관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뷜로가 무대 위에서 자기 작품을 지휘하는 동안에도 그의 아내 코지마와 불륜 행각을 벌였다. 여기에 뷜로의 집에서 함께 살며 세 아이를 낳기도 했다. 결국 코지마를 빼앗아 재혼한 바그너는 스승 리스트와의 관계마저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바그너는 삶에서 여성은 언제나 예술적 영감을 채워줄 ‘정서적 소비재’이자 ‘재정적 안식처’였다. 이토록 이기적이고 타락했던 인간 바그너의 내면은 ‘여성의 희생을 통한 남성의 구원’이라는 예술적 모티프로 변형됐다. 자신의 욕망으로 타인의 삶을 파멸시켰던 바그너는 오페라 속 남성 주인공들에게 순결하고 위대한 여성의 희생을 선물(?)한 것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 도덕적 죄의식을 미학적 장치로 사면받으려 한 모순적 인물이었다.

바그너의 여자가 바뀌면, 명작이 태어난다

바그너에게 사랑과 결혼은 서양 음악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화성 혁명’의 촉매제였다. 바그너의 연애와 결혼, 불륜이 이어질 때마다 희대의 명작들이 태어났다.

첫 번째 결혼 상대인 민나 플라너와의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은 바그너 작품 활동의 ‘초기’로 볼 수 있다. 이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등이 태어났고, 전통적인 다이아토닉 화성을 기반으로 견고한 질서를 만들었다. 이 시기 바그너는 작품 안으로 ‘성녀 대 요부’, ‘아내와 팜므파탈’, ‘정숙한 여성과 욕망하는 여성’의 전형적 이분법을 밀어붙였다. 19세기 가부장적 시각이 짙게 밴 작품들이다.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국립오페라단 제공]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에세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통과 위대함’(1933)에서 “바그너의 여성관에는 관능적 에로티즘과 금욕적 구원관이라는 극단적 두 얼굴이 공존한다”며 “그의 미학 안에서 남성과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여성적 원형이었다”고 말한 이유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젠타(Senta)는 초상화 속 저주받은 선장을 보며 운명적 사랑을 느끼는 여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다에 던져 선장을 구원한다. 수동적인 듯 보이면서도 스스로 초월적 운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그렸다.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Elisabeth)와 베누스(Venus)의 이분법은 더 극단적이다.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는 베누스와 정신적 순결을 상징하는 엘리자베트가 극단적으로 맞선다. 요부를 탐한 탄호이저의 죄는 엘리자베트의 죽음으로 구원받는다.

‘로엔그린’의 엘자(Elsa)와 오르트루트(Ortrud)는 금지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이름과 출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비극을 자초하는 엘자와 달리, 이교도 마법과 정치적 야심으로 가득 차 가부장적 질서에 반기를 드는 오르트루트는 바그너 작품에 등장하는 강력한 악역이자 주체적 여성의 유형이다.

바그너는 오페라 안에서 ‘여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로 보면서 그 캐릭터는 음악적 씨앗으로 삼았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젠타의 노래엔 바다와 저주, 구원의 모티프가 응축돼 있다. 이 음악적 재표가 오페라 전체로 퍼져나가 작품을 유기적인 흐름으로 묶는다. 다만 여성의 죽음으로 남성을 구원한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스위스 취리히 망명 생활 중 만난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불륜 시기는 바그너 오페라의 ‘중기’로 볼 수 있다. ‘금지된 사랑’을 탐닉하던 그때 바그너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거대한 ‘화성적 혁명’을 일으켰다.

여성 캐릭터도 달라졌다. 위태로운 사랑이 미친 영향이 컸다. 그의 오페라 속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의 죄를 씻어주는 성녀’에 머물지 않는다. 이분법의 대상에서 벗어나 욕망하고 분노하고 명령하고 선택한다. 사회적 도덕규범을 과감히 차버리고, 사랑의 의미도 스스로 정의한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발퀴레’의 지클린데는 가부장적 폭력에 유린당하는 비극적 존재였으나, 지그프리트를 태중에 품은 순간 바그너 오페라를 통틀어 가장 찬란한 ‘사랑의 구원 모티프’를 만들어 낸다.

바그너가 위험한 사랑에 한창일 당시 그는 마틸데가 쓴 5편의 시에 선율을 붙여 소프라노를 위한 ‘베젠동크 가곡집(Wesendonck Lieder)’을 작곡했다. 이 중 ‘온실(Im Treibhaus)’과 ‘꿈(Träume)’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핵심 음악적 동기를 사전에 모의 실험하는 듯한 습작이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여기에서 탄생했다.

1막 전주곡의 첫 마디, 그 유명한 ‘트리스탄 화음(F - B - D♯ - G♯)’은 서양 음악사가 수백 년간 지켜온 기능화성학의 틀을 뿌리부터 뒤흔든 혁명이었다.

트리스탄 화음은 전통적인 화성학으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불협화음이 협화음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또 다른 불협화음으로 연결되는 연쇄 전조를 일으킨다. 사랑의 욕망이 달성되지 못하고 계속 유예되는 상태를 음악적 화성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조성의 해체를 담아낸 ‘트리스탄 화음’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끝과 함께 20세기 현대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말러의 ‘부활’·‘대지의 노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중 키스신은 물론 스크랴빈, 쇤베르크가 ‘트리스탄 화음’의 영향을 받아 그들만의 음악을 써 내려갔다.

미해결된 화성이 불안하게 이어지다, 3막 피날레에서 이졸데가 부르는 ‘사랑의 죽음(Liebestod)’의 마지막 마디에 이르면 비로소 나장조(B Major)의 완벽한 으뜸화음으로 모든 불안과 갈등, 위기와 운명을 해결한다. 여성 캐릭터(이졸데)의 욕망이 완성되는 순간, 수백 년간 지속된 화성학의 갈증도 함께 풀어진다. 하지만 이때도 여성 캐릭터는 여전히 죽음으로 향한다.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국립오페라단 제공]

소프라노 니나 슈템메는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을 단순히 남성을 위해 죽어가는 수동적 희생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산”이라며 “그것은 음색과 화성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우주와 완전히 합일시키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자율적이고 강력한 음악적 선언”(2012년 ‘그라모폰 매거진’ 인터뷰)이라고 말했다.

치명적인 ‘불륜의 시기’엔 바그너의 후기 대작들이 쏟아졌다. 코지마 폰 뷜로에게 정착하며 아들 지크프리트가 태어나자 바그너의 거칠고 포악했던 음악 언어는 보다 따뜻하고 친밀한 색채가 더해졌다.

1870년 크리스마스 아침, 코지마의 33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바그너는 스위스 트리브셴 저택 계단에서 13명의 실내악단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지그프리트 목가’를 연주했다. 오페라 ‘지크프리트’ 3막에 등장하는 브륀힐데와 지그프리트의 사랑 이중창 테마를 기악곡으로 정제한 곡이었다. 대규모 관현악의 폭발적 음향만을 추구하던 바그너가 아내와 가족을 향해 바친 가장 순수하고 섬세한 음악적 고백이었다.

오페라 속 여성상은 신화와 역사를 뒤흔드는 주체가 됐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에바는 노래 경연 대회의 상품으로 설정됐지만 극 안에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파르시팔’의 쿤드리는 바그너가 창조한 가장 복잡하고 분열된 캐릭터다. 구원과 유혹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히스테리적 주체로 존재한다.

메조 소프라노 발트라우트 마이어는 “쿤드리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다층적인 여성”이라며 “바그너는 그녀에게 유혹자, 하인, 구원받는 자라는 분열된 자아를 주었지만, 성악가로서 음악을 부를 때 그녀는 극 전체의 내적 모순을 홀로 짊어지고 관객의 영혼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주체가 된다”(2003년 미국 음악지 ‘오페라 뉴스’ 인터뷰)고 분석했다.

바그너와 코지마 폰 뷜로의 위험한 사랑 [챗GPT]
바그너와 코지마 폰 뷜로의 위험한 사랑 [챗GPT]

절대권력 부순 ‘니벨룽의 반지’ 속 네 여성

바그너의 걸작 ‘니벨룽의 반지’ 속 여성들은 더 복잡다단해졌다. 올해로 초연 150주년을 맞은 ‘니벨룽의 반지’은 표면적으론 절대 권력을 향한 남성들의 투쟁극이나, 이 거대한 구조를 떠받치는 핵심 동력은 네 명의 여성이다.

이 작품은 바그너가 1848년부터 1874년까지 26년에 걸쳐 완성한 4부작 대서시다. 대본(성악 가사)을 완성작의 역순인 ‘신들의 황혼’부터 ‘라인의 황금’ 방향으로 집필했고, 음악 작곡은 정순인 ‘라인의 황금’부터 ‘신들의 황혼’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독특한 창작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전야(Vorabend)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과 제1일 ‘발퀴레’, 제2일 ‘지크프리트’, 제3일 ‘신들의 황혼’ 등으로 구성돼있다. 순수 연주 시간만 약 15시간. 전막 사이클을 관람하는 데엔 약 17시간 이상이 걸린다.

무대는 라인강 아래. 아직 신들의 궁전도, 영웅도, 전쟁도 없는 시대. 라인강의 물속엔 ‘라인의 처녀들’이 황금을 지키고 있다. 그 황금으로 반지를 만들면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사랑을 포기할 것’. ‘사랑을 버리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명제에서 14시간의 대장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이 흥미롭다. ‘라인의 처녀들’은 문명 이전의 원초적 자연 상태를 대변하는 존재이고, 대지의 여신 에르다는 신들의 수장 보탄의 가부장적 권력이 가진 유한함을 통렬히 폭로하는 인물로 선다. ‘발퀴레’ 2막에서 프리카는 가부장적 독재자의 자만을 꺾어버리는 법리적 주체로 자리한다. 지클린데는 남성들의 폭력 속에 갇혀 있으나 가부장적 억압을 뚫고 사랑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니벨룽의 반지’를 주요 장면 [챗GPT]
‘니벨룽의 반지’를 주요 장면 [챗GPT]

‘니벨룽의 반지’ 전체의 실질적 주인공인 브륀힐데는 아버지 보탄의 명령만을 따르다 인간적인 진실한 사랑을 목도한 뒤 윤리적 자각과 마주한다. 남성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반지를 손에 끼고 장작더미 속으로 뛰어들어 ‘신들의 세계’를 소멸시키고 세계를 정화하며 ‘새 시대’를 여는 영웅이다.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손(Birgit Nilsson)은 “브륀힐데를 부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편한 신발과 강철 같은 성대”라며 “하지만 성악적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남성 신들이 만든 탐욕과 오만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니벨룽의 반지’의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부장적 텍스트 압도한 ‘음성적 권력’…여성은 희생양일 뿐인가

바그너 오페라 속 여성 캐릭터들은 시대에 따라 치열한 논쟁을 불러왔다.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ément)은 저서(Opera, or the Undoing of Women)에서 “오페라는 여성을 파괴하는 가부장적 기계”라고 규정했다.

바그너 오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젠타, 엘리자베트, 이졸데, 브륀힐데 등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은 가부장적 규범을 위반했거나 남성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희생양이라 봤다. 바그너의 찬란한 음악은 관객을 감정적으로 마비시켜 이 여성들의 억울한 죽음을 아름다운 예술로 착각하게 만드는 미끼라고 주장한다. 에바 리거(Eva Rieger) 역시 “바그너가 자신의 이기적인 구원관을 위해 여성 캐릭터들을 고정관념의 틀에 가뒀다”고 지적했다.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속 엘리자베트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속 엘리자베트 [국립오페라단 제공]

반면 2세대 페미니즘 음악학자들은 표면적 서사만 본 해석에 대해 반박했다. 닐라 파를리는 저서(Vocal Victories)에서 바그너 음악의 핵심은 “무대 위 가수의 ‘성악적 음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바그너 오페라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전위적인 음악 언어인 ‘트리스탄 화성, 무한선율, 사랑의 구원 모티프’는 예외 없이 여성 캐릭터의 입에서 나오기에 여성 캐릭터가 주변 인물 혹은 희생양에 머물지 만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대본상 여성이 희생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무대 전체와 10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를 뚫고 공간을 지배하는 여성 가수의 강력한 목소리는 가부장적 텍스트를 압도하는 ‘음성적 권력’을 가진다는 해석이다. 파를리는 “여성은 희생자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극 전체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체”라고 말한다.

하버드대 음악학 교수 캐롤린 어베이트 역시 자신의 저서(‘Unsung Voice)’에서 ‘음성적 권력’ 개념을 제시하며, “대본이라는 텍스트는 여성의 파멸을 말할지라도, 무대 위 소프라노의 ‘음성적 권력(Vocal Authority)’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소리 공간을 지배하며 가부장적 서사를 압도해 버린다”고 했다.

바그너 오페라에 투영된 여성관은 19세기 가부장 사회가 지닌 시대적 한계와 작곡가의 내면, 예술적 직관이 투영된 복합적 결과물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속 젠타의 발라드에서 시작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졸데의 ‘트리스탄 화성’, ‘니벨룽의 반지’ 브륀힐데의 ‘음악적 여정’은 서양 음악사가 화성학의 틀을 깨고 근대성을 입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세계적인 지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음악은 대본에 적힌 19세기적 사회적 텍스트를 초월한다”며 “무대 위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의 부속물이 아니다. 바그너 오케스트라의 가장 깊은 화성은 여성 캐릭터의 심리를 번역하며, 그들을 세계의 비극과 구원을 주도하는 철학적 주체로 끌어올린다”(2002년 저서 ‘A Life in Music’)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