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명 한국철도기술연구원장.[한국철도기술연구원 제공]
사공명 한국철도기술연구원장.[한국철도기술연구원 제공]

연구실을 나온 기술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기술이 아니라 ‘첫 구매’다. 아무리 우수한 연구개발(R&D) 성과라도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면 연구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공공기관이 주요 수요자인 철도산업에서는 첫 구매가 기술사업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혁신기술 촉진을 위한 국가계약 체계 개편방안(’26.8.28.)’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공공부문이 혁신기술의 ‘첫 번째 구매자(First Buyer)’가 되어 초기시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R&D 단계에서 선정된 기술은 개발과 구매를 연계하고, 기존 규격 중심 계약으로 구매하기 어려운 혁신기술에는 성과 중심 계약을 적용하는 한편, 새로운 계약방식을 시도할 수 있는 ‘조달 샌드박스’를 마련하는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철도산업에는 이 변화가 특히 절실하다. 중소기업이 우수한 부품을 개발해도 운영기관은 현장 적용실적이 없는 제품을 선뜻 구매하기 어렵다. 안전이 최우선인 산업에서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구매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가 책임과 감사 부담을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업은 구매 없이는 납품실적을 쌓을 수 없다. ‘실적이 있어야 구매하고, 구매되어야 실적이 생기는’ 첫 구매의 벽이다.

철도는 AI·센서·로봇·첨단소재 등 다양한 혁신기술이 실제 운영환경에서 검증되는 대표적인 시스템 산업이다. 수요처가 비교적 명확하고 현장 실증이 중요하므로 R&D와 실증, 공공조달을 연계했을 때 정책 효과가 크다. 특히 철도산업은 기술력뿐 아니라 운행·납품실적이 해외시장 진출의 중요한 조건이 되는 만큼, 국내 첫 구매를 통해 확보한 실적은 중소기업이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도 첫 구매의 벽을 낮추기 위해 운영기관의 수요와 중소기업 지원 R&D, 공공기관 성과공유제를 연계하는 실용화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철도 운영기관이 필요한 기술을 제안하고 기업과 성과목표 및 구매조건을 정해 성과공유 협약을 체결하면, 철도연이 공동 R&D를 통해 기술개발과 검증을 지원한다. 이후 성과목표를 달성한 개발품은 성과공유제에 따른 후속 구매로 이어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인천교통공사와 추진한 전동차 핵심 장치의 냉각용 환기팬 모터 국산화가 그 사례다. 운영기관의 수요를 바탕으로 개발한 국산 제품은 현장 적용과 실제 구매로 이어졌으며, 기존 외산제품을 순차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도시철도 2호선 전동차의 충격 흡수 부품인 코니컬 축상고무스프링 국산화에도 같은 실용화 모델을 적용 중이다. 철도연과 중소기업, 인천교통공사가 기술개발과 현차시험을 함께하고, 개발 목표를 달성하면 성과공유제를 통해 후속 구매로 연결할 계획이다. 처음부터 ‘누가 사용할 것인가’와 ‘성공하면 어떻게 구매로 연결할 것인가’를 함께 설계한 것이다.

이런 시도가 개별 사업에 머물지 않으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첫째,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계약 체계 개편방안의 후속 논의 과정에서 개발·구매 연계 계약을 국가전략기술뿐 아니라 철도와 같이 공공수요가 명확하고 현장 실증이 중요한 분야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운영기관이 안전성과 성능이 검증된 국산 신기술을 적극 도입할 수 있도록 구매절차와 적극행정 면책 기준을 명확히 하고, 성과공유제 참여와 혁신제품 구매실적을 기관 평가에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결국 첫 구매는 단순히 개발된 제품 하나를 사 주는 일이 아니다. 우수한 기술에는 현장 진입의 기회를, 기업에는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수요발굴–R&D–실증–첫 구매–시장 확산’을 하나의 사슬로 잇는 것, 그것이 철도 R&D의 마지막 1마일을 넘어 기술혁신을 산업혁신으로 만드는 길이다.


nbgk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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