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박해일은 ‘다작 배우’는 아니다. 대신 이렇다 할 공백 기간 없이 스크린에 얼굴을 비춰왔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주연작 세 편(‘경주’, ‘제보자’, ‘나의 독재자’)이 잇달아 개봉했지만, 2001년 데뷔 이래 신기하리만치 ‘1년에 한 두 편’을 고집해왔다.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하면서도, 십여년 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인간 박해일’도 그의 필모그래피와 닮아 있었다. 말 한 마디도 툭 내뱉는 법이 없었다. 질문을 받으면 미동 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알알이 속이 찬 답변을 내놨다. 매 대답이 진중하고 성실했다. 새 영화 ‘나의 독재자’ 속 허세 가득한 속물 ‘태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 이야기 담은 영화, 해보고 싶었죠”=‘나의 독재자’는 이해준 감독과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3~4년 전 박해일은 이 감독과 ‘기회가 되면 작품 같이 하자’는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지난해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각자의 아버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공감대를 쌓았고, 그 교감이 ‘나의 독재자’라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박해일이 안 해본 장르와 역할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경험이 없었다. 그는 더욱 호기심이 솟았다.

출연을 결정한 뒤 설경구가 아버지 ‘성근’ 역으로 캐스팅됐다. 성근은 남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을 연기하면서, 그 역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게 된 무명 배우. 캐스팅 소식에 박해일은 반색했다. 두 배우 모두 방대한 출연작 수를 자랑하지만,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적은 없었다.

“후배로서 대단히 반가웠죠.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진 않지만 설경구 선배가 아버지 역할을 맡는 것에 전혀 이질감이 없었어요. 평소에도 호감을 품고 있었는데 실제 현장에서도 자연스럽게 맺어지면서 연기하고 있더라고요.”

▶촬영장 밖에서도 설경구를 ‘아버지’라 부른 이유=“어떻게 저런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까 싶었어요.” 박해일의 예상대로 선배 설경구는 ‘에너지가 큰 사람’이었다. 대사를 주고받아 보니 화면에서 보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감정의 폭이나 깊이가 엄청났다.

박해일은 촬영 현장을 벗어나서도 설경구를 ‘아버지’로 불렀다. 문자 메시지를 할 때나 식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박해일은 촬영장 밖에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연기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배역에 일관되게 몰입한 것이 이번 작품에 큰 도움이 됐다.

박해일은 설경구와 함께 한 현장에서 연기 외적인 부분도 주의깊게 살폈다. 연기 경력이 쌓여가면서 그에겐 ‘현장에서 후배들을 어떻게 끌고갈 것인가’ 하는 과제도 생겨났던 까닭이다.

“선배들과 하는 작업은 넋 놓고 보게 되는 지점이 있어요. 영화 촬영이라는 게 100명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고된 일이잖아요. 신뢰를 가지고 재미있게 촬영하려면 선배들의 노하우를 제 식대로 배워서, 현장에서의 제 역할도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더라고요.”

▶“연기는 평생 해도 어려울 것 같아요”= 어느덧 박해일도 연기를 시작한 지 14년 차에 접어들었다. 데뷔 초창기와 비교해보면 달라진 점은 분명히 있었다.

“적어도 먼저 겁먹진 않게 됐죠. 이제는 연기할 때 상대방의 표현들을 받아들여서 느껴보고 내 생각과 비교도 해보고 그래요. 예전엔 그런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거나, ‘내 거라도 잘 해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그러면서도 자만하는 법은 없다. 이제는 연기가 조금은 편해졌냐는 물음에 그는 “평생 어려울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몸 쓰는 연기든 내면 연기든 다 어려워요. 감독의 위치에선 예전에 호흡을 맞췄던 배우라도 새 작품에선 같은 감정도 또다른 식으로 표현하길 원할 수 밖에 없어요. 관객들도 (배우에게) 익숙함 안에서 새로운 걸 기대하다보니 그런 부분도 신경이 쓰이죠.”

사실 박해일은 스크린에선 친숙하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배우로 느껴진다. 대중에게 친숙한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드라마 나들이도 없었던 탓이리라. 영화 홍보 기간에야 ‘인간 박해일’을 간간이 만나는 정도였다.

“영화만 해도 물리적으로 버거워요. 촬영 전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촬영에 몇 개월, 후반 작업하고 홍보하는 시간까지 하면 1년이 훌쩍 가요. 물론 욕심내서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지만, 제가 호흡이 느린 편이라 이 정도가 최선이예요.(웃음) 드라마든 연극이든 연기의 영역에 있는 분야라면 언젠가는 도전할 때가 오겠죠.”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