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실을 언급해도 처벌하는 이상한 규정을 둔 나라다. 언론 보도에서 가장 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김모 씨’이다. 피의자 단계를 넘어 기소가 되고 심지어 유죄 확정판결이 나오더라도 실명을 함부로 쓸 수 없다.
한 달 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사망사건을 대하는 현지 언론의 태도는 정반대다. 총격을 가한 남성은 인적 사항이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나라시에 거주하는 야마가미 테츠야, 41세. 체포 혐의는 살인 미수.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물론 모자이크 같은 건 없다. 우리나라 언론도 피의자의 인적 사항과 사진을 상세히 인용 보도했다. 우리나라 국민은 이상하게도 국내보다 다른 나라 사건 정보를 더 상세히 접한다. 해외 뉴스 검색을 하다 보면 범행 당시 현장 상황을 상세하게 담은 기사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유명 사건의 경우 사료적 가치를 가질 때도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 웹 사이트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요약본이 올라와 있다. FBI가 2016년에 압수수색하며 확보한 증거물을 공개한 것이다. 전 세계 누구라도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 사건이 궁금하다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이 내역을 열람할 수 있다.
비단 수사기관뿐만이 아니다. 해외에선 창작물에 실존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데이빗 핀처의 2007년작 ‘조디악’ 역시 실화를 다뤘다. 1970년대 미국에서 조디악으로 불린 연쇄살인범이 누구인지 찾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조디악의 암호를 풀었던 언론사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물론, 당시 피해자들까지 모두 실명으로 나온다. 더 놀라운 건 이 영화에서 사실상 진범으로 지목한 ‘아서 리 앨런’도 가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인의 추억’을 이런 방식으로 만들었다간 극장에 올리지도 못하고 손해배상과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할 것이다. 2020년 개봉작 ‘남산의 부장들’을 보자. 김규평은 김재규, 곽상천은 차지철, 전두혁은 전두환이다. 박정희를 박정희라 못하고 그저 대통령으로만 언급한다.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사법 후진국이 아닐 텐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건을 재구성해 표현하면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 판결문도 모두 비실명화된 채로 공개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판결문에 ‘박근혜’ 대신 세모나 네모 도형이 들어가 있는 건 코미디다. 미국에선 아예 사건명이 당사자 이름을 붙여 ‘A vs B 케이스’로 작명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는 심지어 2019년 이후엔 공소장도 볼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그나마 최근 법무부가 훈령을 개정하면서 기소된 시점에서 7일 이후엔 공개하도록 했다. 미국은 유명인의 공소장을 아예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받아서 열람할 수 있다. 비용도 들지 않고, 비실명 처리 같은 걸 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도 예전엔 피의자의 얼굴, 실명을 그대로 보도했다. 대법원이 피의자의 인적 정보는 알권리가 보장되는 영역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비실명 보도, 모자이크 처리가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낙인효과에 따른 부작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한가, 한번 토론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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