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생에너지 선진국가인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크리스티안하운(Christianshavn)역 앞을 지나가고 있다. 코펜하겐은 2025년까지 탄소중립 도시로 변모하기 위해 자동차 사용을 줄여 자전거 이용률을 9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설정한 상태다. [필자 제공]
신재생에너지 선진국가인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크리스티안하운(Christianshavn)역 앞을 지나가고 있다. 코펜하겐은 2025년까지 탄소중립 도시로 변모하기 위해 자동차 사용을 줄여 자전거 이용률을 9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설정한 상태다. [필자 제공]

독일 발트해 연안의 항구도시, 루브민(Lubmin)

구(舊)동독 지역에 위치한 조그만 해안마을 루브민은 수백년 전 발트해를 주름잡던 중세 유럽 한자동맹의 옛 영화를 간직한 평화로운 항구도시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러시아 동토를 출발해 발트해 심해를 거쳐 한반도 길이보다 긴 1200㎞를 달려온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 가스관이 처음 유럽 대륙에 상륙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유럽의 정치·경제·안보를 좌우할 에너지 지정학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정중동’의 치열한 현장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부근 지역구 출신이었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탄생시킨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은 유럽과 러시아 간 뿌리 깊은 불신과 반목의 역사를 끝낼 획기적인 미래지향적 공존공영의 파트너십으로 인식됐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그해 9월에 원인 미상의 수중 폭발로 가스관이 끊길 때까지 12년 전의 축배가 독이 든 성배가 될 줄은 미처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유럽에 찾아온 겨울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다자 체제 자유무역과 신자유주의적 급속한 글로벌화로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유럽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연결된 러시아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였고, 천연가스 공급의 4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게 됐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제조업 강국으로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진 독일은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해 독일 엔지니어링으로 값비싼 고급 제품을 만들어 중국 등 해외에 수출해 성장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발전해 왔다.

이렇게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막대한 부(富)를 창출해내던 유럽의 성장머신이 러시아의 전쟁 도발로 갑자기 멈춰버린 것이다.

값싼 러시아산 가스에 취해서 보낸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고 보니 유럽에는 갑작스레 매우 혹독한 겨울이 와 있었다. 독일에 있는 바스프(BASF)의 세계 최대 복합화학공장은 거의 2배가 증가한 천연가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대폭 다운사이징을 하고, 대신 중국에 짓고 있는 약 14조원 규모 공장의 생산을 확대하기로 했다.

유럽이 지난 수십여년 의존해 온 성공방정식은 이제 깨졌다는 자조가 가득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줄 몰랐던 유럽의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처칠의 지혜 그리고 푸틴의 역설

“결코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마라.”

지난달 독일에서 만난 몇몇 기업인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명언을 되뇌었다. 위기가 오면 그간 해내지 못했던 어려운 일들을 해낼 수 있으니, 이 좋은 ‘위기’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명재상의 지혜가 담긴 말이다.

유럽은 기후변화 대응에 관한 한 가장 앞서 있었으나 ‘지구를 구하자’는 ‘기후변화 패라다임’은 때로는 저항에 부닥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구를 구하기 위해 행동을 하기 싫으면 푸틴을 저지하기 위해서 하라’ ‘푸틴에게 에너지를 의존하기 싫으면 신재생에너지를 대폭 확대하자’는 전시 체제 ‘에너지 안보 패라다임’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그간 지지부진했던 기후변화 대응에 새로이 ‘에너지 안보’라는 슈퍼 터보엔진을 장착한 것이다. 달리는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전쟁에 대한 유럽의 가장 성공적인 대응은 무기보다도 전례 없는 속도와 깊이의 에너지 전환이라는 평가였다. 유럽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반은 농담조로 푸틴이 유럽의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에 큰 기여를 했다고 했다. ‘푸틴의 역설’인 셈이다.

독일 루브민에 있는 노르트스트림1 천연가스 해상 파이프라인 육상 시설. [AP]
독일 루브민에 있는 노르트스트림1 천연가스 해상 파이프라인 육상 시설. [AP]

유럽의 혁신적 그린에너지 대전환

최근에 유럽에 가서 직접 본 것은 위기 속 결기와 희망 그리고 실제로 그 위기 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그린에너지 대전환의 모멘텀이었다. EU는 이번 기회를 변곡점으로 삼아 오는 2027년까지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에서 완전히 탈피하겠다는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을 선언하고 획기적인 신재생에너지 확대 방안(REPower EU)을 추진 중이다. 신재생에너지는 ‘자유의 에너지(Energy of Freedom)’라 불린다. 자원 민족주의도, 호르무즈해협을 호위하는 해군 함대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의 독일도 현재 약 46%에 해당하는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오는 2030년까지 80%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지금 유럽에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혁신적 기술을 결합한 녹색에너지 혁명의 거대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과거 석유와 가스의 보고였던 북해는 거대한 인공 ‘에너지 섬(Energy Island)’ 프로젝트를 통해 ‘바다의 사우디아라비아’로 변모 중이다. 해상풍력 발전을 통해 2030년까지 30여개의 원자력발전소에 해당하는 65GW의 전기를 생산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덴마크는 북유럽 천혜의 해상풍력으로 생산된 전기를 북해나 발트해상 인공 ‘에너지 섬’의 플랫폼에서 모아 영국,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각지로 전기를 공급하고, 바람이 세서 남아도는 전기는 그린수소로 만들어 수출한다는 복안이다.

풍력이 센 영국과 수력이 좋은 노르웨이 사이의 북해를 720㎞의 해저 송전망으로 연결해 바람이 강할 때는 영국에서, 수량이 좋을 때는 노르웨이에서 상호 전기를 수출입하면서 신재생에너지의 단절성을 극복하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담대한 그린에너지 전환 정책은 기업들의 혁신과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덴마크 국영 석유가스회사였던 오스테드는 풍력발전을 선도하며 100% 신재생에너지회사로 변모하는 데에 성공했고, 유망 스타트업인 시보그는 바다 위에 띄운 선박에서 부유식 소형 모듈원전(SMR)을 통해 안전하게 원자력발전을 할 수 있는 4세대 혁신기술로 삼성중공업과 특수 선박 개발 등의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세계는 그린에너지 레이스 중 : Green Race to the Top or to the Bottom?

서방의 일부 전문가는 2023년을 그린혁명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 본다.

우선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천문학적인 그린 보조금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전기차, 배터리, 수소 등 투자에 역대급 모멘텀이 생기고 있다. 북미산 차별 조항으로 문제는 있지만 미국과 EU 간에 기후변화에 관해 지금처럼 정치적 입장이 일치한 것은 근래에 매우 드문 일이라, 대결보다는 대서양에 어렵게 생생된 훈풍을 실기하지 말자는 분위기다.

미국에 대응해 EU도 ‘그린딜 산업플랜’과 역외 보조금에 상응하는 보조금을 기업들에 줄 수 있도록 하면서 그린산업 패권과 보조금 경쟁이 ‘바닥으로의 레이스’가 아닌 ‘정상으로의 그린레이스’가 되도록 프레임을 규정하고 있다.

올해 10월부터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의 시범 운용도 시작된다. 이에 더해 2023년은 21세기에 최초로 G7 국가들이 선거를 치르지 않는 해라 정치적 안정이 탄소중립과 그린혁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2023년의 루브민, 그리고 대한민국

2023년 1월 16일, 다시 루브민에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와 많은 정·재계 인사가 모였다.

12년 전 러시아로 파이프라인을 연결했던 이곳에 이제는 러시아 가스를 대체해 LNG 선박을 통해 해외 액화천연가스를 수입할 수 있는 LNG 부유식 터미널을 개소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거대한 선박 형태의 이 LNG 부유식 터미널은 국내 조선사가 건조했다는 점이다. 이 루브민의 새로운 LNG 터미널은 전쟁으로 인한 전대미문의 에너지 위기를 맞아 1년도 채 안 되어 위기를 오히려 에너지 독립과 그린에너지 전환 가속화의 기회로 만들고 있는 유럽의 결기와 저력을 보여주는 큰 상징이라 하겠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적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기술 혁신의 치열한 그린레이스에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 돌이켜 볼 때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아직 8.9%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만난 한 풍력발전업계 인사에게 유럽에서 보는 아시아 시장에 대해 물어봤다.

중국은 잠재력은 크지만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고, 일본은 소극적이고 시간이 걸리는 반면 한국은 잠재력도 있고 속도가 빠르며 제조업의 공급망과 생태계가 발전돼 있어 아시아·태평양 풍력발전의 허브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대답이었다.

에너지 전환의 모멘텀이 생길 때 민간의 창의와 혁신도 살아난다. 처칠 전 총리가 갈파한 ‘좋은 위기’가 없더라도 크게 포효하며 뛰기 시작하는 호랑이의 등에 본격적으로 올라타 달려야 할 때다.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ASIA SOCIETY·APSI) 특별위원·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bons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