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유익은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반전주의자다운 역설의 화법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사회에서 불공정 자본주의에 다시 관심을 던져준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20세기 양차대전이 서양 자본주의 국가의 소득불균형을 교정하는 착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전쟁이 주는 역설적 유익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21세기 자본>은 뛰어난 자료의 수집과 분석력을 보여준다. 서양 자본주의를 읽어내는 해석과 역사적 통찰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더 최근에 나온 장하성 교수의 인상적인 저서 <한국 자본주의>는 그러나 피케티의 자본세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거나 불공정하게 오독(誤讀)하고 있어 의외다. 피케티의 통찰을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상대화시키려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저서에 담긴 유의미한 논리적 설득력을 오히려 떨어트리고 있다.

경제학이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경제학자가 정치경제학자 혹은 정치인이 되라는 말과는 다른 모양이다.

금세기 들어 적지 않은 경제 전문가들이 서양 자본주의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다양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위기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자본주의의 미래를 두고는 제한적 긍정과 명백한 부정으로 갈라선다. 때문에 전자는 부분적 개혁을, 반면에 후자는 전면적 개혁을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한 처방은 더욱 다양하고 확실치 않아 혼란스럽다.

하지만 미래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학의 시각을 빌리면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피케티가 처방한 21세기 자본주의는 묘하게 근대 경제학이 시작된 18세기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계몽주의적 도덕철학과 연관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가 근대 자본주의라는 과거와 연결되는 점이기도 하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기도 하다. 불공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강력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은 <도덕감정론>에서 이미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는 신이 주관하는 세계의 질서와 통한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역시, 신이 부여한 사회경제적 질서가 존재하고 이것이 인간의 도덕적 질서와 연관된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와 통하는 말이었다. 다만 그 실천에 있어서 계몽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 제도(손)에 의지하고자 했을 뿐이다.

<국부론>에서 주장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즉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시장의 조정력이란 효과적 사회경제제도의 도입과 그 필요성,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인간 의지에 대한 믿음의 표현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소득과 자본의 공정한 형성과 분배, 이를 위한 국가의 역할, 조세와 부채 제도의 통합적이고 정밀한 개혁, 이것을 실천할 인간의 의지 등이 21세기 자본주의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시각도 그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인간이 만든 제도에도 희망을 둘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인간의 약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 인간사회의 역사적 실패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도 그렇다. 그것에 희망을 보려면 먼저 자본주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약점과 자본주의의 제도적 실패에 대해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인간 역사에도 최소한의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신념이며 이것이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대한 신뢰와 통한다고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18세기 아담 스미스가 <21세기 자본>과 만날 수 있음은 그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