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8)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제법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는 인민광장 한 복판에는 어느덧 아홉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강유리, 움라우트 패튼, 예원희와 통역원, 신희영과 박박진진, 유호성과 현성애, 그리고 강준호 까지.
서로 식구 간이거나 친밀한 관계였으므로 어색할 까닭이 없는 조합이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색함의 극치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서로 간에 희한한 관계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럼… 방금 버스에서 내린 이 분이 장인어른이 아니고… 저 분이 장인어른이라고요? 저렇게 젊은 분이?”
통역원은 손가락을 들어 강준호와 박박진진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는 눈치도 없이 움라우트 패튼의 말을 성실히 통역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가 묻는 말은 곧 움라우트 패튼이 묻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장인은 무슨 장인!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우고요… 방금 강유리 선수의 아버지라고 읊었던 대목이나 해명해 보시라고요.”
신희영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손사래를 치기에 바빴다. 젊은 모델 박박진진과 해외여행에 나선 사실을 발뺌하기 위해 오히려 강준호에게 역공을 감행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강준호의 낯빛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신 여사… 이럴 줄 몰랐소.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젊은 남자를 맞아들였단 말이요? 나를 중국으로 보내놓고 바람을 피워? 난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생고생을 하고 다녔단 말이지?”
신희영과 강준호가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동안, 유호성은 나름대로 궁금했던 점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강유리 선수가 저 외국인과 결혼 할 거라고요? 저렇게 늙은 남자하고? 미치겠군.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아사리 판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런가하면 예원희는 예원희대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뜸 유호성에게 물었다. 그가 랠리 경기를 포기한 게 확실하다면 당장 2,000만원이란 거금을 신희영에게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호성 선수는 자동차 속도경주를 포기한 거 맞습네까? 지금 죽도록 자동차를 몰아야 할 이 시간에 여기서 어영부영하는 거 보면… 포기한 게 확실하디요?”
게다가 강유리는… 몇날 며칠 동안이나 유호성과 함께 보냈을 현성애를 대면하고 있기가 무척이나 역겨웠다. 이를테면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 와중에 어째서 자기가 현성애를 질투하는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대하는 투가 까칠하기만 했다.
“현성애 선수가 포기하자고 부추겼나요? 여자가 랠리 경기에 참가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꼴이 뭐예요? 창피하게.”
한 마디로 난장판, 비빔밥처럼 뒤섞인 형국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통역원을 뺀 여덟 명이 서로 이상한 관계로 얽힌 채 서로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묻기만 할 뿐 아무도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움라우트 패튼 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했다.
“오우, 아이 해브 노 아이디어. 케세라 세라!”
그는 이렇게 중얼대며 슬슬 뒷걸음질을 쳐서 그 틈새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통역원은 성실하게도 이리저리 오가며 그 말을 통역하기에 바빴다.
“움라우트 회장께서 말씀하시길, 뭐가 뭔지 통 모르시겠답니다. 될 대로 되라는데요?”
“어머나, 될 대로 되다니요… 아빠! 다 쑤어놓은 죽에 코를 빠뜨리면 어떡해요!”
강유리가 이렇게 말하며 울상을 짓는 순간, 인민광장 저 끝자락에서부터 한 줄기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길바닥을 뒹굴던 플라타나스 잎사귀가 그녀의 발목에 척척 휘감겨 왔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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