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디낡은 회벽에 낙엽이 갈색의 꽃을 피웠다. 손을 대면 ‘바스락’하고 곧 부서질 것 같은 마른 꽃이다. 스산하다.

희뿌연 벽에는 널빤지며 나사, 못이 남아 있어 누군가 살았던 곳임을 유추하게 한다. 우리가 흘려보낸 시간 속 추억의 한페이지를 그림으로 옮긴다면 이런 모습일까.

초현실적 기법으로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소멸을 표현한 이 그림은 화가 이정걸의 작품 ‘기억 속에서’이다. 경희대 서양화과를 나와 전업작가로 활동 중인 이정걸은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세밀한 붓질과 감각적인 색조로 그려낸 그의 작품에선 이 땅에서 말없이 소멸해가는 생명의 마지막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가는 아날로그적인 수작업과 컴퓨터 기법을 두루 활용하며 작업한다. 또 생명과 소멸, 자연과 꿈을 오가며 신비로운 화폭을 직조해낸다. 이정걸은 신작회화 30여점을 모아 23~29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