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배우 한혜진은 드라마 ‘가시나무새(KBS2ㆍ2011)’ 당시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착하지 않아 “촬영 때는 매순간 나를 억눌러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 한혜진은 남들이 못하는 말까지 던지는 ‘돌직구 아이콘(’힐링캠프‘)’이 됐다. ‘책임질 일’ 많았던 남자들도 변했다. 그들은 ‘태어나 딱 세 번만 운다’고 강요받던 남성사회의 압박에서도 해방됐다. 아빠들은 2세들(‘아빠, 어디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바보가 된다. 예능대세는 빈틈많은 남자들(‘무한도전’)이고, 혼자 사는 남자들(‘나 혼자 산다’)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군대리아’와 ‘튀긴 건빵’을 칭송하는 남자(‘진짜 사나이’)들은 과연 몇 살쯤 됐을까.
‘착한여자 콤플렉스’는 이미 오래 전 종언을 고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없는 시대에 ‘백마 탄 왕자’를 찾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가 됐다. 이젠 전에 없던 ‘새로운 인종’들의 전성시대다. ‘나쁘다’고 정의되나 ‘당당하고 강한 여자’, ‘찌질하다’ 통칭하지만 ‘허술하지만 섬세한 남자’들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이 시대적으로 공감하는 시각의 변화가 나쁜 여자, 찌질한 남자를 등장하게 했다”며 “과거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남성상, 거꾸로 남자에 의해 포획된 수동적인 여성상에 현대의 대중은 공감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섬세하고 여성적인 모습이 부각된 남자와 능동적으로 혼자설 수 있는 여자들의 모습에 더 공감하는 시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 그 여자는 정말 나빴을까=이제 여자들은 더이상 착하게 살지 않는다. 그게 “명품백에 환장해 사달라 졸라대고”, “숱한 남자를 언제든지 쉽게 갈아탈 수 있는 어장관리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의 신’의 미스김(김혜수)은 화려한 스펙의 정규직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는 빈틈없는 계약직이었다. 매사에 어찌나 깔끔한지 회식수당과 6시 퇴근은 칼같이 지킨다. 통쾌한 ‘을의 반란’이었다. 청담동 입성을 꿈꾸는 앨리스(‘청담동 앨리스’ 문근영)는 ‘3포세대’의 불안을 독기로 품었다.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꼴찌들을 대놓고 ‘차별대우’를 하는 초등학교 여교사(‘여왕의 교실’)는 불편한 진실을 꺼내놨고, 전례없이 의상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조선의 장옥정(‘장옥정, 사랑에 살다’)은 다시 ‘희대의 악녀’가 됐다.
가요계의 ‘기 센 여자’ 이효리와 씨엘은 신곡 ‘배드걸’과 ‘나쁜 기지배’에서 그들을 이렇게 풀이한다. “욕심이 남보다 좀 많은 여자/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여자//독설을 날려도 빛이 나는 여자/알면서 모른 척하지 않는 여자”, “당당한 지조 고귀한 품위/ 눈 웃음은 기본 내 눈물은 무기”. 잘나가는 ‘나쁜 여자’의 새로운 정의다.
대중은 브라운관에서 편견에 맞서고 통념을 뛰어넘은 이들 ‘나쁜 여자’를 보며 쾌감을 느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들의 사회적 욕구가 커짐에 따라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의지도 함께 커졌다. 그런 의지가 강한 여자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로 발전하게 됐다”며 “과거의 가치관에 비쳐본다면 더이상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상은 같은 여자들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고 해석했다.
▶ 그 남자는 정말 찌질할까=불현듯 등장해 ‘외계어’로 분류된 ‘찌질하다’는 형용사는 “지지리도 못났다”, “사람의 외모나 됨됨이가 몹시 추접하고 더럽다, 보는 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대중문화사전)”고 정의한다.
애초부터 ‘평균 이하’를 내걸고 나온 ‘무한도전’의 일곱남자는 유치함과 한심함을 오갔고, 빠마머리 장규직(‘직장의 신’ 오지호)은 완벽한 미스김에게 ‘무다리’ 운운하는 초딩 수준의 멘탈 보유자였다. 눈치도 없고 실력도 평범한데 열의만 가득찬 국선변호사(‘너의 목소리가 들려’ 윤상현)도, 마마보이인 것도 모자라 싫다는 여자를 수백번 찍는 일명 ‘찌질파탈’(‘백년의 유산’ 최원영)마저 등장했다.
‘찌질남’으로 통칭된 이들은 사실 찌질하지도 그리 못나지도 않았다. ‘잘난 여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남자들의 캐릭터는 위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남성중심의 사회, 마초의 세계가 그어놓은 선에서 해방돼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슈퍼맨이 돼야하는 부담감도 내려놨다. 가부장의 권위는 무너진지 오래인 때에 대중은 ‘완벽한 남자’보다 헛점 많은 남자에게 인간미를 느꼈다. 과장된 남성성은 도리어 불편해진 시대가 됐고, 남자들에게서 섬세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이 부각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휴머니즘이 대세로 떠오른 시대다. 완벽하게 똑 떨어지는 남자들의 모습보다 허술하면서도 코믹하고, 단점이 있지만 인간적인 남자들에게 남성은 공감하고, 여성은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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