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 영업사원 욕설파문·라면상무 윤창중 前대변인 인턴 성추행 사건… 갑의 권위·특권의식 표출된 대표 사례

국민소득 2만弗시대 ‘건전한 상식’ 확산 주종관계 아닌 공존 파트너인식 전환을

가진 자를 대변하는 단어 ‘갑’과 아쉬운 것 많은 ‘을’의 고착화된 주종관계에 균열 조짐이 확연하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욕설 파문’이 ‘을의 항변’이 폭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대기업ㆍ중소기업, 프랜차이즈 본사ㆍ대리점 등 경제 주체가 수십년간 유지해온 위계질서는 깨기 어려운 불문율이었고, 이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흐지부지 끝나기 십상이었다.

시간을 가까운 과거인 38년 전으로 돌려보자. 1975년 9월, 삼성 창업자 이병철 선대회장은 헤럴드경제의 전신인 내외경제와 단독 인터뷰에서 “중소기업 없이는 대기업이 있을 수 없다. 둘은 함께 발전해야 할 숙명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을 앞세워 압축 성장을 달성해야 하는 시대 상황임에도,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이 대ㆍ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한 건 그만큼 갑이 을보다 많은 이익을 챙겼고, 이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팽배했다는 점을 미뤄 짐작하게 한다. 국내 최대 재벌이 직접 나서 ‘갑을 공존’을 강조해도 실제 산업ㆍ경영 현장에 적용되는 사례는 극소수였다.

그나마 몇 해 전부터 국내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중소기업과 상생이 기업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갑과 을의 관계를 ‘덜 수직적’으로 만들려는 형식적인 틀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자발적이진 않았다. 대기업만으론 성장에 한계를 느낀 탓이 컸다. 작지만 강한 기업, 이른바 ‘히든 챔피언’을 육성해야 퀀텀점프(Quantum Jumpㆍ대약진)가 가능하다는 진단이 득세한 것이다. 기업별로 상생위원회 같은 조직이 생겼다. 그러나 혜택은 소수에만 집중됐다. 유력 대기업의 협력 업체 선정에서 탈락한 기업은 국내외 경제 상황에 따라 실적이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다. 갑인 대기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의 입장엔 큰 변화가 없었다. 딱히 이런 관계에 대변혁을 가져올 만한 ‘신의 한 수’도 마땅치 않았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을관계의 외연은 기존 대ㆍ중소기업 상생에서 골목상권 보호, 영업사원의 대리점 대상 밀어내기 관행 근절 등으로 확대됐다. ‘경제민주화’라는 화두에 “갑은 가진 것을 조금이나마 을에게 내어 놓고 동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얹혀져 들불처럼 번졌다. 새로운 제도, 하드웨어를 만드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갑을관계를 바꿔보려는 정책적 대안은 국가ㆍ기업 차원에서 꾸준히 검토되고 발표해왔기 때문이다.

관건은 갑이 주인이라는 사고방식, 소프트웨어를 바꿀 수 있느냐다. 포스코 임원이 항공기 승무원에게 라면을 끓여오라며 폭행을 한 건 갑이 대대로 유지해온 권위의식이 표출된 대표적 사례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길에 저지른 여성 인턴 성추행 사건이나 남양유업의 영업사원이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 사장에게 폭언을 내뱉은 것도 갑이 가진 특권의식의 발로다. 모 제과업체 대표는 호텔 직원에게 막말 세례를 퍼붓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에선 “포스코 사건이 심각하긴 했지만 해당 임원을 회사에서 내친 건 심하지 않은가”, “영업사원 특성상 실적을 위해선 물불을 가려선 안 된다”는 등의 동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시대 분위기가 이른바 ‘갑질’을 더는 눈감아주지 않을 만큼 성숙했다는 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주종관계의 폐해를 오랫동안 겪어온 한국인의 피해의식이 SNS를 타고 일거에 터진 것으로만 몰아붙이기 힘들다.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로서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건전한 상식’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사는 국민 사이에 퍼진 결과로 풀이된다.

갑과 을의 수평적 관계 정립을 위한 활시위는 이미 당겨졌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최근 한국을 찾아 갑을관계를 언급하며 “비단 한국만이 겪는 것도 아니고 좀 더 많은 논의가 돼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렇게 공론화하는 사회는 많지 않다.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라는 증거”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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