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로마 위드 러브’서 로마에 간 미국인으로 출연 추억·명성·스캔들·꿈의 공간 흥미로운 이방인의 로마여행기
“로마는 시간이 멈춘 도시야. ‘인생무상’ ‘제행무상’을 알게 하는 곳이지.”
미국에서 로마에 갓 도착한 영화 속 등장인물 누군가가 말한다. 어디 이 사람뿐일까. 첫 발걸음을 한 모든 이방인에게 ‘멈춘 시간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곳. 건축물로 육화한 ‘영원’과 사진으로 남겨진 ‘추억’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도시.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명성과 스캔들, 로맨스의 꿈을 만나는 공간.
우디 앨런 감독이 런던(매치포인트), 바르셀로나(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파리(미드나잇 인 파리)에 이어 로마 여행을 떠났다. 영화 ‘로마 위드 러브’다.
로마에 간 미국인이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은 어떨까. 앨런 감독이 ‘로마로 간 미국인’으로 직접 출연한다. 딸이 만난 이탈리아인 사윗감을 보기 위해 로마를 찾은 은퇴한 오페라 감독 ‘제리’ 역이다. 난기류에 휩싸였던 비행 내내 고생했던 제리는 도착부터 투덜투덜이다. “빨갱이 사위라니 최악이군. 난 무신론자지만 공산당은 아니었다고! 요트나 타고 다니는 부자를 만날 것이지!”
딸의 예비 배필은 변호사지만 빈자를 위한 무료 변론을 앞장서고 말끝마다 “노조” “노동자의 권익”을 들먹이는 급진파. 하긴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했던 곳이 바로 이탈리아가 아닌가. 1922년엔 베니토 무솔리니가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세계사상 첫 파시즘 정권의 수립을 알렸던 곳이고, 그와 대립하던 현대 공산주의운동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잠들어 있는 도시 로마. 전후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그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효시이자 걸작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무방비도시’의 원제는 ‘로마, 무방비도시’다. 제리의 이야기대로 로마에서 요트를 타는 젊은 부호를 만나고 싶다면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가 있다.
하지만 제리의 사윗감 이름은 한국 관객이라면 화가나 영화감독(자전거도둑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을 단번에 떠올릴 만한 ‘미켈란젤로’. 사윗감 앞에서 오페라 전문가로 아는 척이나 하려고 했더니 “증조부가 베르디”란다.
1813년 태어나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오페라 작곡가. 앨런은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나라임을 잊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제리의 예비사돈은 평생 장의사를 해왔지만,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예비사돈이 욕실에서 샤워를 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제리는 성악가 데뷔를 권한다.
이 영화에는 푸치니의 ‘투란도트’와 레온 카발로의 ‘팔리아치’ 등 오페라의 유명 아리아와 공연 장면이 등장한다. 극중 제리는 오페라 무대에서 한창 활약할 때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등장인물에게 모두 생쥐 분장을 시켜 무대에 올린 엉뚱한 예술가로 설정됐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독이자 주연 로베르토 베니니가 맡은 레오폴드. 평범한 중년의 로마시민인 그는 어느날 출근하기 위해 문 앞에 나서는 순간, 수많은 취재진의 카메라 세례와 질문 공세를 받는다. “오늘은 뭘 먹었느냐” “오늘은 무슨 색 팬티를 입었느냐” 등 일거수일투족, 모든 사생활이 언론의 타깃이 되는 스타가 된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이 TV 출연에, 사인 공세에 시달리는 레오폴드가 어느날 묻는다. “제가 왜 유명한 거죠?”. 대답이 걸작이다.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유명하지요.”
그가 가는 곳마다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파파라치’다. 파파라치의 기원지 또한 로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라돌체비타)’에서 가십뉴스를 뒤쫓는 사진기자의 이름이 ‘파파라초’였다.
‘명성’과 ‘스캔들’의 도시, 로마는 또 다른 커플을 유혹과 혼돈의 로맨스 속으로 빠뜨린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 밀리와 안토니오는 로마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정착을 준비한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 안토니오는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급작스럽게 고위층을 주로 상대하는 고급 콜걸 안나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안토니오는 콜걸과 엉겁결에 얽혀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고, 아내 밀리는 뜻하지 않게 당대 최고의 섹시스타라는 영화배우의 침실에 들게 된다.
한편, 로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미국의 유명 건축가인 중년의 존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은 젊은 건축학도 잭을 만나 연애 코치를 하게 된다. 로마는 이들에게 건축과 로맨스의 도시다. 로마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 ‘건축가의 배’다.
이 모든 해프닝과 로맨스의 끝에 스페인광장과 트레비분수가 있다. ‘로마 위드 러브’의 엔딩신으로 여기 말고 더 마땅한 곳이 있을까. 오드리 헵번이 ‘진실의 문’에 손을 집어넣던 곳,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에서 미국에서 온 여주인공이 “로마에서 1년만 살게 해달라”며 동전을 던지던 곳 말이다.
펠리니의 ‘로마’가 로마인이 본 로마라면, 앨런의 ‘로마’는 이방인의 가장 흥미로운 로마 여행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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