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7회> 총칼 없는 전쟁 (27)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겉으로 보기에 카 레이싱은 기계를 타고 달리는 스포츠임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심성이 흠뻑 녹아있는 스포츠임에도 분명하다. 똑같은 핸들을 조작하고 똑같은 페달을 밟지만 드라이버의 마음상태에 따라서 쇳덩이로 만들어진 기계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선수의 마음상태가 경기 결과를 좌우하는 멘탈 게임의 대명사로 골프를 꼽곤 하지만, 기계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맡기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카 레이싱은 심리적인 요소 외에도 사랑과 애증까지 결부된 희한한 멘탈 게임으로 규명지어야 마땅할 것이다.
“노멕스만 걸쳤다면 제대로 질러보겠는데, 노멕스는커녕 알몸으로 달리고 있으니… 배짱 좋게 지를 수가 없어. 치타야, 제발 살려줘라!”
코너를 돌아설 때마다 유호성은 쇳덩이 기계에 불과한 1974년 산 치타에게 이렇게 애원했다. 곧이어 고막이 찢어질 듯한 타이어 마찰음이 들려오고 몸이 한 쪽으로 급격히 쏠리곤 했는데… ‘아웃 인 아웃’, 혹은 가상의 라인을 타며 폼 나게 내지르질 못하고 코너마다 브레이킹을 하고 있다는 징표였다.
노멕스란… 레이싱 슈트를 만드는 특수소재를 일컫는 말이다. 노멕스로 만든 드라이빙 슈트를 입고 있으면 섭씨 700도 이상의 불길 속에서도 무려 12초 동안이나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속도로 내달리다가 길 옆 옹벽이라도 들이 받으면 화재로 이어질 것이 당연지사인데 지금 옆자리에서 비명이나 질러대고 있는 강유리는 그야말로 태어난 상태의 알몸 그대로였으니… 아무리 배짱 좋은 유호성이라 해도 불상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타가 성모 마리아야? 하느님이야? 아니면 달마대사라도 돼요? 왜 애꿎은 치타에게 살려달라고 빌어요? 그럴 경황 있으면 시원하게 내질러 봐요. 이 꼴로 경찰에게 잡히면 혀를 깨물 고 말거야.”
목욕 도중에 불이 나면 얼굴만 가리고 뛰쳐나오는 것이 여자의 특성이라고 하던데, 어차피 얼굴에 드라이빙 헬멧을 뒤집어썼으니 경찰에게 잡혀도 무방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 꼴로 잡히면 혀를 깨문다고 엄포를 놓는 중이었다.
“유리 씨 안전 때문에 그런다고요.”
“난 괜찮다니까요? 내질러요. 저것들을 따돌리라고… 엄마야, 경찰 싸이렌 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리네. 환장 하겠군.”
“알았어요, 그럼 최고 속도로 달릴게요. 눈이나 꼭 감아요.”
이 말을 끝으로 유호성은 이를 악물었고 강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옥타브나 높아진 엔진 소리와 함께 1974년 산 치타의 속도계기판에 달려있는 바늘이 급격히 오른 쪽 위로 치솟았다.
1960년이던가? 벨기에 그랑프리에 참가했던 영국 드라이버 ‘알렌 스테이시’도 아마 지금의 치타만큼이나 속도를 높여 달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선수도 지금 옆자리에 앉아있는 강유리처럼 얼굴에 드라이빙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달리던 터라 유리창을 깨고 날아든 새와 부딪쳐 사망하고 말았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유리창은 물론 헬멧의 안면부마저 박살났던 것이다.
“50년 전에 비하면 지금 헬멧은 튼튼하게 제작되었을 거야.”
유호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문득 50여 년 전에 새와의 충돌로 사망한 스테이시 선수를 떠올린 걸 보면… 강유리를 무척이나 아끼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어서 이 튼튼하고 무거운 헬멧 좀 벗겨달라고요.”
쫓고, 쫓기고, 헬멧을 벗길 틈도 없고, 벗긴 옷을 입힐 틈도 없고, 에스자로 굽은 코너는 수시로 들이닥치고, 코너를 돌 때마다 그녀의 탐스런 젖가슴이 리듬을 타듯 출렁이고, 경찰은 바짝 다가오고, 마음은 급하고… 비는 쏟아지는데 시어미는 부르고, 젖먹이는 매달려 울고, 고삐 풀린 송아지는 도망가고, 치마끈은 풀어지지 않고, 설사는 급하고… 염병, 무엇부터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난감하기만 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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