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5일, 케이블 TV 시험방송이 개시된 이후 그 해 3월 1일 대한민국엔 본격적인 다채널 시대가 도래했다. 플랫폼이 곧 권력이었던 지상파방송 독점 시대에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채널 선택권을 준다며 출사표를 던졌지만, 입맛대로 골라보기에 총 24개 채널이 내놓는 ‘콘텐츠의 질’은 미심쩍었다. 무려 20년, 케이블TV가 지상파를 위협할 만한 콘텐츠를 제작할 역량을 가지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 2000년 통합방송법 제정으로 신규 채널이 대거 개국하며 케이블TV는 하나의 사회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 세계 최초의 게임채널 온게임넷이 그 무렵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던 PC방의 열기와 더불어 ‘프로게이머’라는 스타 직업군을 찾아냈다. ‘어둠의 경로’로만 유통됐던 미국, 영국, 중국 드라마를 안방에서 보게 되자, 쏟아지는 새로운 콘텐츠 앞에서 새로운 문화 현상도 나타났다.

‘케이블 라이크’라는 용어가 생겨난 건 2006년 tvN이 개국하면서였다. 당시 CJ E&M의 채널들은 지상파와의 차별화된 전략을 세우기 위해 그간 금기시했던 19금 코드 등이 바탕한 독특한 케이블 콘텐츠의 색을 만들었다. ‘독고영재의 스캔들’, ‘리얼스토리 묘’와 같은 페이크 다큐물도 CJ E&M을 통해 나온 장르였다. 드라마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2007년엔 섹시 코미디, 공포물은 물론 사극까지 만들며 제작의 폭을 넓혔다. 당시 케이블 TV의 양대 산맥이었던 온미디어와 CJ 미디어를 중심으로 자체콘텐츠가 활기를 띄던 때였다. 이 무렵 tvN에선 최초의 시즌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최장수 토크 프로그램 ‘택시’가 등장했다.

2009년 7월 첫 방송된 엠넷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지난 몇 해간 지상파 PD들이 CJ E&M으로 대거 유입되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20년의 긴 시간동안 시청자와 함께 하며, 방송가의 지형을 흔들고, 케이블TV의 위상을 높였던 프로그램을 각 채널의 담당자들과 함께 꼽아봤다.

▶ CJ E&M, ‘슈스케’부터 ‘꽃할배’, ‘미생’까지=사실 케이블TV 20년사는 CJ E&M의 20년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콘텐츠의 쏠림 현상이 빚어진다. 그만큼 숫자도 월등하고, 파괴력도 컸다.

CJ E&M 관계자들은 케이블TV 20주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사 프로그램으로 먼저 ‘슈퍼스타K’(엠넷)를 꼽는다. 2009년 7월 첫 방송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는 국내 방송가에 오디션 붐을 불러온 프로그램으로, 특히 시즌2의 경우 15%대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써내면 지상파의 권력을 위협한 최초의 방송이었다. CJ E&M 입장에선 금요일 밤 11시를 개척한 프로그램이다.

tvN의 시청층을 확대한 일등공신으로 관계자들은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꼽는다. 2008년 tvN이 종합오락채널로 개편한 뒤 가장 큰 목표는 자극적인 콘텐츠의 색을 지우고 대중친화적이며 젊고 트렌디한 채널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경쾌하고 발랄하지만 엣지가 없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롤러코스터’는 tvN 성장의 “일등공신으로 30, 40대까지 시청층이 확대된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은다.

tvN의 무서운 성장은 지상파 출신의 이명한, 나영석, 신원호, 김원석 PD가 채널로 몸을 옮기며 시작됐다. 신원호 PD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나영석 PD의 ‘꽃할배’, ‘삼시세끼’, 김원석 PD의 ‘미생’이 대표적이다. ‘응답하라 1997’와 ‘응답하라 1994’는 지상파와 케이블의 경계를 허물며 문화현상을 만든 대표 드라마이고, 방송가에서 보면 ‘금토드라마’라는 새로운 편성법칙을 만들어낸 콘텐츠로 꼽힌다. 그 뒤는 지난 한 해 최고 히트작인 ‘미생’으로 이어졌다. ‘미생’은 기존 드라마 문법을 파괴한 혁신적인 콘텐츠로 ‘응사’의 성공 이후 주춤했던 tvN 드라마의 저력을 보여줬다.

나영석 PD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2013년 CJ E&M으로 이적, ‘꽃보다’ 시리즈부터 ‘삼시세끼’까지 내놓으며 tvN은 10대부터 50대 이상 시청층까지 아우를 수 있는 채널로 거듭났다. 최근 종영한 ‘삼시세끼 어촌편’은 금요일밤 10시 예능 전쟁터에서 14~15%대(닐슨코리아, 유료방송 가입 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상파를 포함한 동시간대 최강자로 올라섰다. 잘 나가던 지상파 PD들의 이적이 방송환경의 지형 변화를 불러온 셈이다. 나영석, 신원호 PD는 케이블 채널의 장점으로 “콘텐츠 제작환경이 자유롭고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제는 플랫폼보다 콘텐츠가 채널을 움직이는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2010년 후반에 등장한 이 같은 콘텐츠는 “과거 불편함이 없지 않았던 센 콘텐츠에서 정서적으로 배려와 따뜻함을 가져가는 콘텐츠로의 변화”를 이끈 주축이다.

▶ 티캐스트 E채널 ‘용감한 기자들’, 현대미디어 채널칭 ‘삼국지’, JTBC의 가세=CJ E&M이 국민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동안 다른 경쟁 채널들의 성과는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친다.

CJ E&M의 뒤를 잇는 최대 MPP로 총 10개의 채널을 보유한 티캐스트에선 E채널의 ‘용감한 기자들’을 대표 콘텐츠로 꼽는다.

‘용감한 기자들’은 지난 2012년 8월 ‘특별기자회견’으로 첫 선을 보인 이후 2013년 2월 현재의 제목으로 방송, 연예, 사회, 정치 등 각분야 기자들이 숨은 취재담을 이야기하는 국내 최초 기자토크쇼로 현재 102회까지 방송했다. 매주 수요일타깃 시청률(1539, 닐슨코리아 집계, 수도권 기준)에선 지상파를 포함한 동시간대 3위(1%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채널의 대표 콘텐츠로 ‘용감한’ 브랜드를 살려 ‘용감한 작가들’, ‘용감한 랭킹’으로 프로그램을 확대 생산했다.

현대미디어 계열의 채널칭은 국내 안방 시청자에게 중국 드라마를 소개한 일등공신이다. 특히 95부작 ‘삼국지’는 제작기간만 5년, 제작비 250억원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드라마로 중국 시청률 1위에 올른 화제작이었다. 채널칭은 ‘삼국지’의 전 판권을 독점 구매해 선보였고, 40~50대 남성 시청층을 TV 앞으로 끌어들이며 높은 인기를 모았다. 이후 극장판과 DVD로도 제작되는가 하면 지상파인 KBS에 재판매하며 방영되기도 했다.

수백개의 채널이 난립하는 가운데, CJ E&M을 제외하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콘텐츠를 꼽는 것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일과 같다. 양적 팽창을 거듭 중인 다채널 환경에서 광고시장은 해마다 격감하고, 제작비는 나날이 증가하자 PP채널들은 경쟁력 있는 자체 콘텐츠의 제작을 미루는 현실에 봉착했다. MPP뿐 아니라 영세PP들이 안고 있는 이 같은 문제에선 케이블 업계의 비정상적인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 지난 2011년 개국한 종합편성채널로 인해 시장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콘텐츠는 JTBC 예능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졌다.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썰전’, ‘마녀사냥’, ‘비정상회담’은 물론 ‘냉장고를 부탁해’에 이르는 스튜디오형 예능의 부활은 장기적인 경제불황에서 이어진 광고시장의 침체가 불러온 2010년 이후의 방송가의 생존전략으로 꼽힌다.

/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