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럴드 H스포츠=정일원기자 ] 시작과 끝,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인생이라면 축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축구 역시 '우리 편 골대에서 상대 편 골대 사이' 그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Box to Box]에서는 이처럼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편집자 주] # 축구와 상의 탈의
지난 5일 '메없산왕'(메시가 없으면 산체스가 왕) 이라는 신조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알렉시스 산체스는 리오넬 메시가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약하지만 가장 담대한 슛으로 칠레의 사상 첫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었고, 그 순간 산체스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다. 설령 칠레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지켜본 사람들로 하여금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99년 미국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 오른 미국과 중국은 연장전이 지나도록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미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선 브랜디 체스테인은 우승을 확정짓는 승부차기를 성공시켰고, 그녀는 감격에 겨운 포효와 함께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다. 당시 중계화면에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스포츠 브라만을 입은 브랜디 체스테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남자 축구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상의 탈의 셀러브레이션을 여자 축구경기, 그것도 전 세계 팬들이 지켜보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선보인 브랜디 체스테인은 "선정적이고 의도된 상업적 노출이었다." 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후 축구의 규정과 경기 방식을 결정하는 협의체인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2004년 2월 골든 골과 실버 골 폐지 등을 골자로 한 개정된 경기규칙을 발표했고, 이 규칙엔 심판이 상의 탈의를 하는 선수들에게 옐로카드를 부여하는 규정 역시 포함됐다. 타 스포츠에 비해 축구에서는 보편적인 골 뒤풀이로 여겨졌던 상의 탈의가 이 새로운 규정으로 인해 적어도 축구 경기 중에는 경기장 내에서 그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이 생긴 이후에도 상의탈의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축구계의 뜨거운 감자다. 골 셀러브레이션은 골을 넣은 선수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기 때문에 순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 행위를 선수 개인이 갖는 표현의 자유로 봐야한다고 혹자는 말한다. 99년 여자 월드컵 이후 생긴 '상의 탈의의 상업적 노출로의 변질 방지'라는 그럴듯한 명분 이면에는 '유니폼 스폰서 지키기'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고, 이러한 주장은 '벗지 않음이 벗음보다 더 상업적일 수 있다.' 라는 목소리로 환언되어 상의 탈의 규칙의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소지도 분명 존재한다. 2005년 세리에 A 라치오에서 활약 했던 파울로 디 카니오가 라이벌인 AS로마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후 선보였던 상의 탈의와 나치식 경례는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아직까지도 파시스트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본다면 몸을 매개로 의도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상의 탈의는 여타의 골 셀러브레이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가지는 동시에 그만큼 오용(誤用)의 여지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을 넣고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 던지는 선수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항상 경기장 내에 존재해왔다. 경고라는 부담을 감내하면서 까지 그들이 기어코 옷을 벗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벗기 위해 넣은 그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에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연장 후반 극적인 결승골로 사상 첫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석연찮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조국에게 가장 빛나는 왕관을 선물한 이니에스타는 골을 넣은 직후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졌고, 그가 입고 있었던 흰색 내의 위엔 하늘색의 짤막한 문구인 'DANI JARQUE SIEMPRE CONNOSOTROS (다니엘 하르케는 항상 우리와 함께)'가 쓰여 있었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기 위한 이 짤막한 문구는 이니에스타의 소속팀인 FC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더비'로 얽혀있는 다니엘 하르케의 소속팀 RCD 에스파뇰의 팬들마저 감동시켰다.
지난 2월 프랑스 리그앙 PSG와 캉과의 경기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전반 2분 만에 팀의 선제골을 만들어냈고, 즐라탄은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자신의 유니폼을 벗었다. 유니폼을 벗은 그의 몸은 이전엔 없던 크고, 작은 문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당시 소속팀이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다음 경기 출전 정지라는 부담을 무릅쓰고 그가 상의를 벗었던 이유는 자신의 몸에 새긴, 세계식량계획(WFP)이 후원하는 어린이들의 이름을 팬들에게 직접 소개해 도움을 호소하기 위함이었고, 당시 그의 행동을 비난 했던 팬들도 '그가 도움의 손길을 외면했던 자신들이 받아야할 경고를 대신 받았다.'며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0년 인터밀란을 거쳐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한 마리오 발로텔리는 그가 경기 중 행했던 비신사적인 행위와 경기장 밖에서의 엉뚱한 행실로 항상 팬들과 언론의 구설에 올랐다. 이후 사람들은 그가 경기장 안에서 선보이는 뛰어난 축구 실력 보다 경기장 밖에서 일으키는 사건 혹은 사생활과 관련된 축구 외적인 부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팬들의 비판과 비난 섞인 조롱에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았던 발로텔리는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유니폼 상의를 벗어 젖혔다. 그가 입고 있었던 하늘색 내의 위에는 'Why Always Me?(왜 항상 나야?)'라는 중의적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항상 자신을 비판했던 팬들과 언론을 향한 질문이자 "왜 항상 나만 골을 넣지?" 라는 자신감의 반문이었다. 골이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만큼이나 축구 선수가 경기장 내에서 가장 주목 받는 때는 바로 골을 넣은 '다음'이다. 2002년 월드컵 미국과의 경기에서 안정환이 기록한 헤딩골과 2010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박지성이 기록한 선제골이 각각 그들이 선보였던 골 셀러브레이션과 함께 회자되는 것은 골을 넣은 뒤 보여줬던 그들의 뒤풀이가 경기 그 자체가 갖는 의미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노출, 정치적 혹은 종교적 메시지의 표현으로 인한 갈등을 차단하겠다는 국제축구평의회(IFAB)의 취지들은 결국 축구라는 스포츠가 갖는 '순수성의 사수'라는 명분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선수의 가치가 이적료로써 계산되고, 가장 큰 소리로 순수성을 주창해야할 조직이 앞장서서 정치 권력화 되어 그것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선수들의 순수한 가슴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의 탈의는 축구, 나아가 우리네 삶속에서 삼켜져 가고 있는 보편적 가치들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오늘날의 네모난 해시태그가 아닌 둥그런 축구공을 매개로하는 선수들의 이러한 '벗음'을 축구 판에서 순수한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 그들만의 독특하고 진중한 화법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된 입장에서의 올바른 소통은 카드라는 일괄적 제재가 아니라 박수라는 유연한 지지가 되어야 하진 않을까? <사진1> 알렉시스 산체스 / ⓒ El periscopio 캡처 <사진2> 브랜디 체스테인 / ⓒ USA 투데이 <사진3>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 ⓒ 더 썬(The Sun) 캡처 <사진4>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 WFP 홍보영상 캡처 <사진5> 마리오 발로텔리 / ⓒ 맨체스터 시티 공식 홈페이지 캡처 1one@h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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