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일한기자] 대형 마트에 있는 ‘매장 속 매장’(숍인숍)은 별도 계산대가 있어 따로 계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숍인숍 매장에서 계산을 하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오다가 직원에게 붙잡혔다면 절도죄가 성립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판결이 나와 눈길을 끄네요.
8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전해진 판결입니다. 문모(49)씨는 지난해 9 월21일 저녁 9시 서울 송파구의 L 대형 마트에 있는 ‘숍인숍’인 H전자제품 매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진열대에 있는 80만원짜리 태블릿 PC가 마음에 들었는지, 전원 케이블을 떼고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문씨는 따로 계산하게 돼 있는 H전자제품 매장 계산대를 그냥 통과해 매장 입구로 향했습니다. 이를 본 H매장 직원이 그의 뒤를 쫓았죠. 당황한 문씨는 갑자기 식료품 코너 라면상자들 사이에 이 태블릿PC를 내려놓고, L마트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직원들은 절도를 숨기려 했다고 판단해 재빨리 문씨를 붙잡았습니다.
얼핏 절도를 시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습니다.
검찰도 문씨가 신제품이 아니라 진열품을 가져나간 점, 직원이 쫓자 식료품 코너에 태블릿PC를 내려놓은 점, 그가 이전에도 숍인숍을 이용한 적이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절도 혐의로 문씨를 기소했습니다.
문씨는 항변했습니다. H매장에 계산대가 별도로 있는 줄 몰랐고, 태블릿을 사려 했지만 비싼 것 같아서 반품하는 의미로 내려놓은 것이라고요.
설득력이 있나요? 좀 애매하긴 합니다. 직원들이 따라오고 있는 걸 알면서 라면상자 사이에 태블릿을 내려놓은 것은 이를 감추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심리한 형사 9단독 강수정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왜일까요. “문씨가 태블릿을 훔치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정황만으로 절도 혐의를 인정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겁니다.
실제로 대형마트 매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숍인숍 구조에 익숙하지 않아 누구나 그냥 들고 가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문씨가 정황상 절도를 하려 했을 수도 있지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고 가다 당황해서 슬쩍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강 판사는 “마트 구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의 경우 L마트 계산대만 통과하지 않으면 절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법이라는 게 정황만으로 죄를 묻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jumpcu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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