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기훈 기자] 반백의 머리칼에 덥수룩한 수염, 형형한 눈빛과 중저음의 목소리. 어쩐지 자꾸 도인(道人)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때론 너스레를 떨며 호탕하게 웃다가도 세계관과 작품론을 펼칠 때면 ‘호랑이의 눈으로 보고 황소의 걸음으로 걷는다’는 호시우보(虎視牛步)란 말이 떠오른다.
10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최민식은,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대호’의 주인공 명포수 ‘천만덕’스러웠다.
영화 ‘대호’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와 호랑이 사냥꾼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짐작했겠지만 호랑이는 100% 컴퓨터 그래픽(CG)의 산물이다.
모든 애로점은 여기서 출발했다. 최민식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인 대호를 향해서 액션과 리액션을 상상해가면서 연기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며 “혹시 놓친 게 없는지 심리적으로 예민해지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를테면 대호가 천만덕을 향해 달려들 때 어느 높이로 뛰어올랐다가 어떤 각도로 쓰러지는 지, 총에 맞았다면 어느 부위를 맞고 어느 방향으로 피를 흘릴 것인지, 모든 것을 상상 속에 맡기고 계산 속에서 연기가 펼쳐졌다. 더 중요한 것은 대호와 천만덕의 정서적 교감이었다. 최민식은 “물리적인 교감도 있지만 감정선이 참 막막했다”고 했다.
실체가 없는 대호를 상대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의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정말 고마운 게 영화 속에 구현된 대호가 내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CG로 완성된 캐릭터를 거듭 칭찬했다.
“대호가 이를테면 고양이처럼 나오면 망하는 거잖아요. (웃음)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대호가 이상하게 나오면 헛수고가 되잖아요”. 언론시사회에서 처음으로 대호의 존재를 확인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속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받아들고선 CG 기술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는 결국 ‘대호’의 이야기에 설득 당하고 말았다.
그는 “옛사람들이 산(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기도를 하며 살아왔는지,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했다. 또 “단순한 항일영화가 아닌 자연과 교감하고 섭리를 지키려는 천만덕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충돌이자 갈등”이라고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살생으로 인한 업보를 떨치려는 천만덕과 대호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포수 구경(정만식 분), 호랑이 가죽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일본군. 대호를 두고 이들의 욕망이 뒤엉키며 충돌한다.
이윤만으로 따질 수 없는 세상의 섭리, 천만덕의 세계관은 최민식의 연기관과도 포개져 있었다.
최민식은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가 관객이고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지만, 아주 엄밀히 이야기하면 대중의 취향을 위해 연기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상업성이 작품 선택의 첫번째 기준이 될 순 없다는 것.
그는 “내가 진짜 좋아서 하는 작품이어야 한다. 스스로 마음이 동(動)하고, 작품에 설득 당하는 게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에 “기획적 마인드에서 탈피해서 만듦새에 열중하고 즐기는 수밖에 없다. 시선을 작품 바깥에 맞추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에게 성취란 곧 과정이었다. 그는 “진짜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이란 것을 회를 거듭하면서 느낀다”면서 “만약 제대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다면 그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정말 무엇과도 바꾸기 힘들다”고 했다. 장인다운 면모였다. ‘대호’의 흥행 여부에 대해서는 “작품은 내 손을 떠났다”면서 “우리 이야기에 동의하냐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아들 석 역할을 맡은 배우 성유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성유빈을) ‘어르신’이라 불렀다. 말도 느릿느릿 하고, 밥도 느릿느릿 먹고(웃음). 우린 다 먹었는데 밥을 3분1도 안 먹었어요. 그럼 유빈이가 ‘먼저들 일어나세유~’이러고. (웃음)”
한편 ‘명량’에 이어 ‘대호’까지 두 작품을 연속으로 사극을 선택한 그는 차기작과 관련 “당분간 상투는 없습니다. 짚신 안 신을 거예요”라며 너털 웃음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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