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 4명 중 1명 꼴 수사ㆍ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

[헤럴드경제=양대근 기자] “술 취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강간당한 상황만 기억날 수 있나.”, “사건 당시 어떤 의상을 착용하고 있었나.”

3년 전 회식 자리에서 직장 상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A씨는 조사를 받던 도중 수사관의 발언에 심한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 충격을 받은 A씨는 범죄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우울증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 중 수사과정이나 재판 또는 지인의 시선이나 인터넷 댓글 등 사회 편견으로 인한 ‘2차 피해’에 고통받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8일 한국피해자학회와 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수사관 또는 재판관으로부터 수치심을 유발하는 발언 등으로 2차 피해를 겪는 경우는 전체 성폭력 관련 고소인의 약 25%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통계에 드러나지 않는 숫자까지 감안하면 더 많은 이들이 추가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

김민정 한국성폭력상담소 객원연구원(범죄학 박사)이 235명의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성폭력 사건 이후 피해자가 주변인들로부터 경험한 여러가지 편견은 이후 겪게 되는 후유증과 상당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2차 피해의 지속적인 경험은 피해자로 하여금 ‘잘못된 통념’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탓하게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심리적ㆍ신체적 문제를 야기하거나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김 연구원은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기 혐오와 자기 불확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경우 이후 사회적인 고정관념을 더 많이 접했다면 후유증이 더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수사관의 인식이나 전문성 부족도 2차 피해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경남 3개 중소도시에서 근무하는 경찰관 182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53.8%가 ‘여성의 심한 노출로 인해 성폭력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어 술에 취한 여성이 성폭력을 당한 경우나 늦은 밤에 여성 혼자 길을 걷다가 범죄가 발생했을 시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답한 이들 역시 각각 37.4% 20.3%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 연구원은 “한국의 성폭력 방지 정책은 가해자 처벌에 국한돼 있다”며 “성범죄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2차 폭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심화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성폭력을 단순히 가해자ㆍ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실질적인 보호를 위한 추가적인 예방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여성의 야한 복장이 성범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뜻을 알리고자 여성들이 일부러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행진하는 ‘슬럿워크(Slut Walk)’ 시위는 지난 2011년부터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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