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적과의 동침 (23)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굶주린 코끼리 네 마리가 가뭄에 찌든 길을 함께 걷던 중에 마침내 포도 한 알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 네 마리의 코끼리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머리를 치대며 긴 코를 뻗쳐 그 작은 포도 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일 것이다.

누군가 실수해서 포도 알을 밟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판이니 그 싸움은 과격하면서도 정교하게 치러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수박이나 호박 정도만 되어도 좋았을 것을… 이를테면 유호성의 실체가 아직은 포도 알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미미했지만 단물이 듬뿍 배어있어서 오히려 문제였다.

“호성이 그 녀석을 절대로 남편에게 빼앗길 수 없어요. 어쨌거나 우리 가문의 황태자인데 빼앗기는 순간부터 자동차 운전수로 전락하게 된다고요.” 신희영은 올해의 스포츠마케팅 팀 예산안에 대해 브리핑을 받다 말고 불쑥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겨우 12억 원. 아무리 눈을 비벼가며 브리핑 차트를 들여다보아도 12억 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예산이 쥐꼬리였으니 히스테리가 도질 만도 했다.

“하지만 레이싱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무려 3000억 원이나 된답니다. 무려 우리 예산의 250배에 달하는 금액예요. 운전수 아니라 조수라도 좋으니 그쪽에 줄을 서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스포츠마케팅 TF팀장인 강준호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지금 신희영은 단물이 가득 밴 포도 알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 유민 회장과 각축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좀 더 유심히 분석해보면 강준호 역시 또 다른 코끼리였다. 강준호 역시 유민 그룹의 황태자인 호성이를 차지하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딸인 강유리의 미래를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럼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기로 한다. 유민 회장, 신희영, 강준호가 각각 야심에 찬 코끼리라면 나머지 한 마리의 코끼리는 누구일까? 그야 물론 복수에 눈 먼 현성애 아닐까?

“그까짓 자동차 놀이에 매달 250억 원을 쓰면서 귀족스포츠인 골프에 쓰는 돈이 겨우 한 달에 1억 원? 웃기지도 않아 정말. 문제는 우리 골프 팀에 핵이 빠져있기 때문예요. 찐빵에 앙꼬가 빠져있다는 뜻이라고요. 강유리 선수만으로는 더 이상 예산을 확보하기 어려워요. 어떡하든 호성이를 우리 팀에 데려와야 돈이 따라온다 이 말이지요.”

“호성 군을 우리 팀에 합류시킨다 해도 예산을 늘려 받긴 어려워요. 이사회 자체를 소집할 수 없단 말입니다. 계열사 중에 작은 회사 하나라도 사모님 소유로 분리해내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법인 분리? 남편이 바람피우다 걸렸을 때 이미 제안했어요. 조그만 회사 하나 떼어내기로 약속도 받았고요. 다만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게 문제지요. 1년 동안 그 꼴을 어떻게 봐요? 자동차 놀이 하면서 3000억 원이나 흥청망청 탕진하는 꼴을…”

“당장에 힘으로 아드님을 빼오는 수는 없을까요?”

“아직은 남편이 어엿한 대표이사예요. 수하에 늘어서 있는 이사진도 남편의 하수인들이고요. 그러니 무슨 재간으로 실력행사를 할 수 있겠어요?”

그 순간, 강준호는 옆자리에 있는 강유리에게 눈을 찡긋했다. 둘이 부녀관계라는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서로 간에 존칭을 써야하는 어색한 관계였지만, 눈으로 주고받는 대화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사모님, 그렇다면 미인계를 써보는 건 어때요? 회장님께 저돌적으로 덤비는 것보다는 옆길에 숨어서 장본인인 유호성 군을 공략하는 거예요. 혹시 카르멘 환상곡 들어보셨어요? 비브라토 주법이 돋보이는 현란한 바이올린의 매력… 화려함의 극치를 느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음악에 빠져들다 보면 수소와 맞선 투우사처럼 흥분하게 되지요. 화려함 속에 비수가 숨어있다고나 할까요? 미인계라는 것이 꼭 그와 같거든요?”

강유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카르멘 환상곡의 운율을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콧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보고있자니…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거 기막힌 생각예요. 유리 양이 그 녀석 좀 꼬여 봐요.”

신희영은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며 기꺼워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