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날개에 숨긴 칼 (4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유민 제련그룹의 후계자이든, 천하의 미모를 자랑하는 레이싱 모델이든 이런 상황에선 서울로 수학여행 온 낙도 어린이처럼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세요! 하면 네! 대답하고, 저렇게 해야 돼요! 해도 역시 네! 하고 대답하는 그 순수성이란.
“자, 지금이에요. 뛰어요!”
여객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현성애는 이렇게 명령했고, 유호성과 김지선은 눈앞에 보이는 빈 택시를 향해 처절할 정도로… 달렸다. 그 모습이 가관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낯이 간지러웠으며 또한 얼마나 발바닥이 뜨거웠을까.
여름철 한낮 동안 햇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뛰어본 사람이 있는지? 중국 하남지방에선 철판을 달구어놓고 그 위로 오리를 뛰게 한 뒤에, 그 오리 발바닥을 요리해서 먹는다고 하던데…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김지선과 유호성의 꼬라지가 마치 그 오리와 다를 바 없었다.
“언니, 사람들이 쫓아오지요? 하악 하악!”
김지선은 숨이 턱에 닿은 채로 이렇게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뛰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유호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학처럼 긴 다리에 시골 할머니가 걸쳐 입을 만 한 고쟁이를 입었으니 가랑이가 바투어서 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저씨, 그만 쳐다보고 어서 목욕탕으로 가주세요.”
현성애가 이렇게 운전기사를 다그친 후에야 택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아직도 놀란 모습으로 룸밀러를 통해 뒷자리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무슨 큰 사고를 당했나요? 그런데 환자치고는 뜀박질을 너무 잘해서…”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서 목욕탕으로! 오라이!” 남자들은 전국 어디서나 노소를 불문하고 그 심리가 같았다. 유호성도 알몸에 빨간 고쟁이 하나를 걸쳤지만 택시 기사에겐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붕대로 친친 감은 여인, 김지선의 에스라인이었던 것이다.
현성애의 기획안대로 택시가 멈추자마자 김지선은 목욕탕을 향해서 뛰었고, 유호성은 허름한 여관 건물을 향해서 뛰었다. 현성애는 그들을 뒤쫓아 다니며 입욕료를 지불했고, 여관비를 지불했다. 그러나 현성애의 기획안이 여기서 엔딩마크를 찍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회장님이세요? 네, 저예요, 비서실 현성애.”
그녀는 호젓한 곳으로 물러 나와서 다짜고짜 유민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회장 격인 신희영에게 직통전화를 때리고 싶었지만 지금쯤 하와이에서 골프를 치고 있을 터이므로 일단 유민 회장에게 전화를 넣은 것이었다.
“뭐야? 그 녀석이 레이싱 모델과 밀월여행을 갔다고? 그런데 어째서 옷을 홀랑 벗고 목포 거리를 뛰어다녔다는 게야? 아, 답답해요. 좀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아니야, 내 당장에 비행기 타고 그리로 갈래요. 그 연놈들을 꼭 잡아두라고. 현양! 두 시간 후에 나랑 비행장에서 만나요. 내 이것들을 그냥…”
현성애는 전화를 끊고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이토록 가슴이 시원할 수 있을까? 이만하면 됐다. 이제 서서히 가문의 복수가 시작되는 셈인데 1차적인 시도는 성공이라고 여겨졌다.
‘김지선이라고 했나? 얄미운 년 같으니. 뭐? 레이싱 모델? 모~델? 어디 목욕탕 주인에게 혼쭐이나 나보렴.’
목포거리는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네온사인이 밝혀지는 중이었다. 현성애는 그중 빛나는 간판을 단 커피전문점으로 찾아들어갔다. 아무래도 냉커피 한 잔을 마셔야 깔끔한 정신으로 유민 회장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속이야 어찌되었든 유호성의 옷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는 않을 터였다. 유민 회장과 함께 여관에 들이닥쳤을 때 유호성이 알몸이어야 더욱 극적일 테니까… 그렇다면 김지선은? 밤새워 옷을 기다리다 알몸으로 쫓겨나든 말든 내버려 둘 셈이었다. 앗싸, 가오리!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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