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회> 바람 부는 길 39

난장판은 무려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천 권이 넘는 책이 모두 바닥으로 쏟아져 나오고 열댓 개나 되는 커다란 화분의 흙이 모두 쏟아졌으니 재벌 2세의 방은 공사장 막노동판과 다름없었다.

“먼지 때문에 정신없지만… 도청장치는 없는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방문과 천정도 뜯어봐야 확실한 걸 알지요.”

“방문과 천정을 뜯자고요? 부수자는 말씀인가요?”

“그럼 지금 농담하는 줄 압니까? 어이, 총무부장. 가서 도끼 좀 가져와요.”

재벌 2세는 근처에서 서성이던 총무부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홧김에 부려본 허세인 줄도 몰랐다. 하지만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 총무부장의 손에는 관우의 청룡언월도처럼 서슬이 퍼런 도끼 한 자루가 들려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이러는 지는 몰라도… 힘 좀 써보겠다는 투로 총무부장이 팔뚝부터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보안에 관한 사항입니다. 이 사무실 어딘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총무부장께서는 방문과 천장을 부수고 그 속을 확실히 뒤져보세요. 천장은 도청기기를 은폐하기에 좋은 장소 아닙니까? 특히 전력선 주위를 확실히 살피세요.”

재벌 2세는 이렇게 한바탕 신경질을 부린 후에 본인 스스로도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최고경영자의 사무실은 도청의 주요 목표가 되는 법. 그러니 경영자가 쓰는 책상 위의 만년필, 컴퓨터, 전자계산기, 지구본, 그리고 책상서랍 속의 모든 물품 등등을 차례차례 뒤져봐야만 할 것이다. 그뿐이랴? 항상 재벌 2세와 붙어다니던 송달민의 방도 똑같이 뜯어내고 부숴내야만 할 판이었다.

이런 상황도 이심전심이라 해야 할까? 마침 그 순간에 정치권의 높은 양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줄 훤히 아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늦은 밤에 전화드려서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당장 만나야만 할 것 같아서 또다시 전화드렸습니다.”

높은 양반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감정도 없고 음의 높낮이도 없으면서 사람의 치를 떨리게 하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전화로 약속할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신분을 확인해야 할 의무도 있지 않겠습니까?”

“동감입니다. 그럼 신분 확인도 시켜드릴 겸… 우리 쪽에서는 위원장님을 직접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장소는 고구려호텔 32층 스카이라운지, 그곳에서 우선 저와 만나시면 제가 위원장님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위원장께서는 멀리 계십니까?”

“라운지 옆, 특별실에 계실 겁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거성의 재벌 2세와 정치권의 높은 양반 간의 통화는 명쾌하게 끝났다. 하지만 양쪽 모두 마음까지 명쾌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의심스럽기만 할 뿐. 거성 측에서는 이스라엘과의 철통 같은 비밀 사안을 상대가 도청했을 것이라 의심하는 중이었고, 정부 측에서는 거성이 수조 원대의 엄청난 프로젝트를 정부에까지 숨기며 비밀리에 추진하는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보좌관! 우리에게 거성의 비밀 프로젝트를 폭로한 작자가 누구인지부터 서둘러 알아봐 주세요. 청와대에 부탁해서 도움을 청해도 무방합니다. 어쩌면 국정원에서 나서야 겨우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들이 어떤 세력인 줄 알아야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거성재벌 2세와 딜을 하지요.”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거성 재벌 2세를 북한으로 보내려면 어차피 국정원과 의논해야 할 텐데 차제에 양수 겹장을 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재벌 2세를 북한으로 보내려는 높은 양반의 뜻을 보좌관은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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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